조정애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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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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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한 성적표현과 쾌락을 가득 묘사함으로써 에로의 끝판을 보여주는 원고를 읽었다.
부잣집 아들의 패륜를 다루고 끝내 경찰에 의해 막을 내리고 다시 되돌리는 내용이다.
소설이라는 명목아래 인간의 욕망을 그 깊은 묘사를 부끄러움 없이 펼쳐내는 문장들을 끝까지 최고의 회심작 소설이라 고집한다.
(Pixabay=Eli Digital Creative / Brisbane Australia)
세상에서 소설 속에서 치밀한 성적 묘사를 예술이냐 외설이냐 로 토론이 분분하고 청소년 유해성 소설이 1990년 전후로 마광수의 소설에도 나타났었다. 지나친 묘사의 외설을 이유로 문학 작품의 창작성에서 벗어낫다 하여 금서를 넘어 구속되기도 했다.
문학작품에서 삶 자체인 어떠한 표현도 자유로운 창작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작품 속에서 인생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가 새겨져 있어야 한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고 그 작품을 읽어보아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자신의 경험이나 외설책을 탐색하다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으로 변화시키려는 소설 중에는 읽어내기가 민망스러운 청소년에게 유해한 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한다.
그런 문필을 반대하는 학자나 문학 집단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외설적 문필의 작품을 반대해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치밀한 묘사와 그 속에 담긴 깊은 사유가 소설의 목적에 벗어나지 않는 인간의 자유표현이라 할지라도 인정할 수 없는 지나친 성적 묘사는 고상하고 지적인 부류의 목소리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평론가도 문단도 더구나 법원에서 가려야할 문제는 아니라할지라도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유해한 글은 다시 생각해야 할 작가의 몫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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