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의 아버지여

역사에서 사라진 초춘호(初春號) 여객선 침몰사건

조정애 칼럼니스트 승인 2022.10.26 18:55 | 최종 수정 2022.11.01 14:20 의견 0

미 군정시대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글을 씁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길에 만주에서 체포되셨던 아버지

미 군정 시절 일본 게이요대학 영문과를 나오신 아버지 (조영수曺永秀)는 6사단 사령부 통역 책임자였습니다.

중요한 기밀을 찾기위해 우편국에서 우편을 검사하고 번역하는 일에 영어가 능통한 50명이 맡아 일을 하고 아버지는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아버지는 부산역 광장에 며칠을 지새우며 누렇게 뜬 수많은 귀한동포들에게 적산집을 구해주었고 6.25때는 피난민들을 위해 분골쇄신하셨습니다.

내가 네살되던 해 겨울
1950년 12월 16일 아침 9시
초춘호 여객선에 승선하여 친구와 함께 아버지는 삼천포에 작은 할아버지 기일을 지내러 출발하셨습니다.
너무 많은 인원과 화물을 실은 배에 물이 넘어오자 승선자들이 더 이상 갈 수 없이 위험하니 배를 돌려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파도도 잔잔한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함께 승선한 헌병이 선장에게 총을 겨누었고 급히 회항하다가 출발 30분 만에 초춘호 여객선 침몰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치 세월호를 보는 듯합니다.

여객선 (부산 -여수)출항을 허락한 수상경찰서에는 백명 넘은 시체를 안치시켰고 시체를 찾으러 울부짖는 가족들의 행렬이 오래도록 끊이지 않았고 부산 항만은 무조건 유가족을 윽박지르고 막아내는 경찰과 대립하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부산일보 기록)

나는 네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 진상을 찾아 다니다 부산일보에서 뒤늦게 기사를 읽고 통곡을 했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이름과 주소와 40세 나이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왜입니까? 그 이후로 초춘호 침몰참사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왜 역사의 기록에서 그 사건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을까요?
모든 해양기록, 모든 연표,수상경찰서에도 그런 사건은 모른다고 답을 하는 것일까요?

2006년도 과거사진상조사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승만대통령이 가장 신임한 교통부장관 아들이 초춘호여객선을 운영하는 대동선박회사의 부지사장이었습니다.
초춘호는 곧 건져올렸습니다.

1950년 12.16일 초춘호 침몰사건 3년 뒤에 일어난 창경호 (昌景號) 침몰사고는1953년 1월 9일 전남 여수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던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서남쪽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 부근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한 사고입니다.
창경호 침몰로 법조계와 유명인들이 사망하자 그들 유가족은 끈질긴 법적대응으로 보상을 받게 됩니다.

밝혀진 바로는 초춘호 여객선과 창경호 여객선은 같은 대동선박회사의 소속이었습니다.

사라진 초춘호 여객선 침몰사건을 반드시 역사 앞에 그 진상이 밝혀지고 내 아버지와 함께 사망한 이들의 한을 풀어낼 수 있게 되기를 오늘도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밝혀주지 못한 이승만 정권의 엄청난 부패와 비리를 누군가의 힘으로 감추어진 사실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두번 다시 초춘호와 세월호 같은 참절비절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올해 발간 될 시집 ‘일출보다 큰 사랑’ 과
‘화산석’에 나의 아픈 흔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네 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직도 네 살배기 슬픔이 그대로 남아서 돌연변이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떳떳한 모습의 딸로 서기까지

조정애 시인이 대구경북작가회의 2019년 10월 문학제 초청
'초춘호 여객선 침몰사고' 시낭송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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