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의 고질적 분절화 문제 해결에 나섰다. 각 부처가 독자적으로 신규 사업을 추진하던 관행을 차단하고, 국무총리 주재 국제개발협력위원회의 사전 의결을 거치도록 하는 강력한 통제 장치가 마련됐다.
정부는 2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55차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개최하고 'ODA 의결사업 변경·신설 지침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번 개정의 핵심은 위원회에서 의결되지 않은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각 부처가 예산 확보 후 자체적으로 사업을 발굴하고 위원회에는 사후 보고하거나 포괄적 승인만 받던 관행이 이제 불가능해졌다.
사업 변경에 대한 관리 감독도 대폭 강화됐다. 사업 취소, 예산 전용, 사업 내용 구체화 등 주요 변경 사항이 발생하면 주관 기관은 심의 착수 시점부터 국무조정실에 내용을 공유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차기 위원회에 보고되는 페널티가 부과된다.
투명성 제고를 위한 정보 공개 의무도 강화됐다. 기존 연 1회에 그쳤던 사업 변경 승인 내역 보고가 분기별로 확대되고, 해당 내용이 대국민에게 공개된다. 납세자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ODA 사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 기능을 강화하려는 조치다.
이번 제도 개편은 이재명 대통령의 ODA 혁신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지난 19일 외교부 업무보고에서 "전 부처의 ODA 사업에 대해 제대로 이뤄지는지 분석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또한 "ODA 중 우물 파주기 등의 사업도 있을 수 있으나, 시대 변화에 따라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며 "문화 진출이나 경제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위원회는 이날 '인재양성 ODA 주요 성과 및 향후 계획'도 함께 확정했다. 교육부는 정부 초청 외국인 장학사업의 석·박사 과정 중 연구개발(R&D) 전형 선발 인원을 확대하고, 인공지능과 반도체 등 첨단 분야 지원자를 우대 선발한다. 선발부터 학업, 졸업 후 진로까지 관리하는 차세대 국외인적자원관리시스템도 구축할 예정이다.
이번 거버넌스 혁신은 한국 ODA 체계가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제도적 응답이다. 한국은 1987년 기획재정부 산하 대외경제협력기금과 1991년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이 각각 설립되면서 유·무상 분리 체제로 출발했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과 국제개발협력기본법 제정으로 통합 조정 체계를 마련했으나, 40여 개 부처와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ODA 사업을 수행하면서 분절화 문제는 오히려 심화됐다.
감사원은 여러 차례 감사를 통해 병원 건물만 짓고 의료 장비 지원이 이뤄지지 않거나, 유사한 새마을 운동 사업을 여러 부처가 중복 수행하는 등 예산 낭비 사례를 지적해왔다. 국제사회도 이 문제를 주목했다. OECD DAC는 2012년, 2017년, 2024년 동료검토에서 일관되게 분절화 문제 해결을 권고했다.
올해 ODA 총예산은 약 6조 7972억 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전년 대비 5343억 원 증가했으며, 무상원조가 3조 5100억 원, 유상원조가 2조 2100억 원으로 편성됐다. 지역별로는 아시아가 32.1퍼센트로 가장 높고, 아프리카 15.8퍼센트, 중남미 8.5퍼센트 순이다.
분야별로는 기후 위기 대응 관련 예산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에너지 분야는 전년 대비 4.1퍼센트포인트 증가한 10.0퍼센트, 환경 보호는 1.4퍼센트포인트 증가한 4.6퍼센트를 기록했다. 총 사업 수는 1976개에서 1936개로 감소한 반면, 사업당 평균 예산액은 18.8억 원에서 22.3억 원으로 증가해 선택과 집중 전략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번 조치는 한국 ODA가 양적 팽창 단계를 넘어 질적 성숙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처 이기주의를 차단하고 범정부 차원의 전략적 일관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실제 원조 효과성 제고로 이어질지는 향후 실행 과정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중앙 통제와 현장 자율성의 균형, 그리고 개도국과의 진정성 있는 파트너십 구축이 성공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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