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미사에서 선 교황 레오14세/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영상 캡춰
로버트 프란시스 프레보스트(Robert Francis Prevost) 추기경 출신의 레오 14세(Leo XIV) 교황이 12월 24일 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한 첫 성탄 전야 미사에서 "이방인과 가난한 이들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라며 인간 존엄성과 환대의 가치를 역설했다. 역사상 최초의 미국 출신 교황인 그는 즉위 후 첫 성탄 메시지를 통해 이민자 배척과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던졌다.
레오 14세는 이날 오후 10시(현지시간) 시작된 미사에서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12년 성탄 강론을 인용하며 "오류의 밤이 섭리적 진리를 가리는 한, 다른 이들, 어린이들, 가난한 이들, 이방인을 위한 자리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땅에서 인간을 위한 자리가 없다면 하느님을 위한 자리도 없으며, 하나를 거부하는 것은 곧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교황은 "왜곡된 경제(distorted economy)가 인간을 단순한 상품(merchandise)으로 취급하게 만드는 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시어 모든 사람의 무한한 존엄성을 드러내신다"며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촉구했다. 이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교황청 사회학술원이 공동 작성한 희년 보고서에서 97조 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부채 문제를 비판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시카고 출신이지만 페루에서 20년 가까이 선교사와 주교로 활동한 레오 14세는 교황명 선택부터 의미심장하다. 그는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 권리를 옹호한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한 레오 13세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름을 택했다. 인공지능 시대를 "새로운 산업혁명"으로 규정한 그는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도록 국제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미사 시작 전 교황은 비가 내리는 광장에서 대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약 5천 명의 신자들을 위해 직접 밖으로 나와 "성 베드로 대성전은 매우 크지만, 불행히도 여러분 모두를 수용하기에는 충분히 크지 않다"며 위로를 건넸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출신답게 친교와 겸손을 중시하는 목자적 면모를 보인 것이다.
성탄 전날 비가 내리는 성베드로 대성전 앞 광장/교황청 공식 영상 캡춰
◆ 한반도 외교 지평 확대...2027년 서울 방문 북한 변수
레오 14세의 메시지는 2027년 8월 서울에서 열릴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를 앞둔 한국 외교에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교황은 "서쪽 끝 리스본에서 극동의 서울로 이어지는 순례"가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낸다며 기대감을 표명한 바 있다. 전 세계 약 100만 명의 청년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이 행사는 한국이 평화와 연대의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는 외교적 플랫폼이 된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10월 바티칸을 방문해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국무원장에게 교황의 방북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교황이 북한을 경유해 서울에 오신다면 한반도 평화에 결정적 기여를 할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방북을 촉구했다. 교황청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완전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신임 주교황청 한국 대사 스테파노 신형식은 교황청과 북한 사이의 가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은 미국 국적의 레오 14세가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를 푸는 데 전임자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교황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점은 한미 동맹과 교황청 외교 사이의 균형을 요구하는 과제를 제시한다.
교황 레오14세/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영상 캡춰
◆ 한국 사회 그림자 직시해야
레오 14세의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왜곡된 경제" 비판은 급속한 성장 이면의 사회적 양극화를 겪는 한국 사회에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한국 전체 노동력의 약 3.5%에 불과한 외국인 노동자가 전체 산업재해 사망자의 10~15%를 차지하며, 이들의 산재 사망 확률은 내국인 대비 3~4배에 달한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변경 권리를 제한해 현대판 노예 계약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39.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이며, 이는 OECD 평균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서 노인의 절반 가까이가 빈곤에 시달리는 현실은 교황이 지적한 왜곡된 경제의 전형적 사례다.
레오 14세는 "모두, 모두, 모두(todos, todos, todos)"를 외치며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포용적 태도를 계승하고 있다. 그는 즉위 초기 LGBTQ 가톨릭 활동가인 제임스 마틴 신부를 만나 격려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포용 정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2027년 방한 시 교황이 이주노동자 쉼터나 쪽방촌을 방문한다면, 한국 사회가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누구를 희생시켜왔는지 성찰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대성전 내부에는 약 6천 명의 신자가 참석했으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어린이들이 아기 예수상에 꽃을 봉헌하는 예식이 거행됐다. 교황은 가자 지구와 우크라이나 등 전쟁으로 고통받는 지역의 청년들을 언급하며 평화를 강조했다.
6천 여 신자가 참석한 성탄 전야 미사가 진행 중인 베드로 대성전/교황 레오14세/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영상 캡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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