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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동북아시아 외환시장에서 이례적인 현상이 포착됐다. 중국 위안화가 달러당 6.9983위안을 기록하며 지난해 9월 이후 처음으로 심리적 저지선인 7위안 아래로 내려간 반면, 한국 원화는 1,482원까지 치솟으며 4월 이후 최악의 약세를 기록했다. 통상 중국 경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원화는 위안화와 동반 움직임을 보여왔으나, 이번에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디커플링'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건 한국의 수출 성적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11월 수출액은 610억 4천만 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무역수지도 97억 3천만 달러 흑자를 냈다. 특히 반도체 수출은 172억 6천만 달러로 전년 대비 38.6% 증가하며 9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경제 교과서대로라면 이런 무역흑자는 원화 가치를 끌어올려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전문가들은 원인을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투자 열풍에서 찾는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2월 22일까지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순매수액은 329억 4천만 달러에 달했다. 특히 10월에는 68억 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이들 투자자의 주축은 30대(30.1%)와 40대(25.6%)로, 국내 부동산 시장 정체와 국민연금 고갈 우려 속에서 미국 시장을 '생존의 탈출구'로 여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이를 두고 "해외 투자가 멋있어 보여서"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경제 활동의 허리층이 한국 원화 자산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다는 심각한 신호다. 3분기 말 기준 한국의 대외금융자산은 2조 7,976억 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지만, 이 돈이 환율 방어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간이 보유한 달러는 국가 비상시에도 동원할 수 없는 '잠긴 자산'이기 때문이다.

중국 위안화의 강세는 정책적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골드만삭스는 위안화가 경제 기초체력 대비 약 25% 저평가돼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인민은행은 12월 달러·위안화 거래 기준 환율을 시장 예상보다 낮은 7.0471위안으로 고시하며 절상을 용인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2026년 최우선 순위를 '내수 확대'로 정한 것과 맞닿아 있다. 위안화 강세는 수입물가를 안정시키고 가계 구매력을 높여 내수 소비를 끌어올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율 역전 현상의 배경에는 10월 30일 부산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의 영향도 크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Xi Jinping) 중국 국가주석은 약 100분간 회담을 갖고 무역 전쟁 확전을 막기 위한 전술적 합의에 도달했다. 대중국 관세를 기존 57%에서 47% 수준으로 내리고, 레거시 반도체에 대한 신규 관세를 2027년 6월까지 유예하기로 했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를 1년간 중단하고 미국산 농산물 구매를 확대하기로 약속했다.

부산 합의는 한국에 단기적 숨통을 틔워줬지만, 장기적으로는 양날의 검이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들은 공급망 재편 시간을 벌었지만, 중국산 제품에 대한 미국 관세가 낮아지면서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또한 미·중 갈등 완화로 위안화 족쇄가 풀린 반면, 한국은 자본 유출과 중국의 기술 추격이라는 이중고가 부각되며 통화 가치가 추락했다.

한국은행은 달러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26년 1월부터 6개월간 외국환 중개회사의 외화 예금 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지급하는 한시 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언 발에 오줌 누기'식 미봉책으로 평가하며, 기업들이 한국 내 투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한 달러 가뭄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2026년 전망은 엇갈린다. NH투자증권 등 전문가들은 평균 환율을 1,450원 수준으로 예상하며 높은 환율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 한국은행은 가계부채와 환율 딜레마로 금리를 2.5%에서 쉽게 내리지 못해 경기 회복이 늦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일각에서는 4월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이 성사되고 부산 합의가 연장되면 원화가 1,380~1,420원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나온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천명한 '국익을 지키는 실사구시 외교'가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민연금과 한국은행 간 외환 스와프 한도를 대폭 늘리고,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에 대한 대가로 환율 안정 지원과 무역확장법 영구 면제를 패키지로 협상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또한 위안화 강세로 구매력이 높아진 중국 소비자를 겨냥한 고급 소비재 수출을 강화하고, 한중 자유무역협정 후속 협상을 통해 서비스 시장 개방을 앞당겨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디지털 통상 규범과 기후 변화 협력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아 한국이 단순히 미·중 사이에 낀 나라가 아니라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의 위상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데이터 이동, 인공지능 윤리, 디지털 화폐 표준 제정 과정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되 아시아 국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소형모듈원전 등 원자력 기술을 활용한 한미 협력으로 제3국 시장에 함께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율은 이제 단순히 수출입의 결과가 아니라 나라 간 돈의 이동 경쟁 성적표이자 지정학적 위험의 온도계가 됐다. 2026년 한국 외교는 경제 안보와 지정학적 가치를 아우르는 고차원 전략으로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겨야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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