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가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10년 내 연 2~3척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을 건조할 계획이라는 10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가 나오자, 실제 건조 장소를 두고 한미 양국 간 입장 차가 드러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필라델피아 건조"를 명시한 반면, 한국 정부는 "국내 건조"가 합당하다는 입장을 밝혀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정치적 배경: MASGA와 트럼프의 '승인'
이번 WSJ 보도는 10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원잠 보유를 승인하며 필리조선소를 건조 장소로 지목한 지 약 2주 만에 나왔다. 이 계획은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MASGA,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정책 및 이와 연계된 1,5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조선업 협력 펀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MASGA는 8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한국 대통령이 먼저 제안한 한국 측의 대미 투자 패키지다6.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예고에 대응하기 위한 '반대급부' 성격으로, 한화는 2024년 12월 필리조선소를 1억 달러에 인수하며 MASGA 프로젝트의 핵심 실행 주체로 부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원잠 승인'은 한국의 숙원 사업(원잠 보유)을 MASGA 프로젝트와 정치적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이는 한국이 원잠 기술을 받는 대가로, 1,500억 달러 펀드를 미국 내(필리) 조선소에 투자하여 '미국 산업 재건' 및 '일자리 창출'에 기여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입장 충돌: '필라델피아' vs '국내'
그러나 원잠 건조 장소를 두고 양국 최고위층의 메시지는 엇갈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29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한국은 그들의 원자력 잠수함을 바로 여기, 유서 깊은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고 장소를 명시했다. 이는 MASGA 펀드의 미국 내 투자 성과를 가시화하려는 미국 측 목표가 반영된 것이다.
반면 안규백 한국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필리조선소가 기술력과 인력, 시설 등이 상당히 부족한 면이 있다"고 공식 평가했다. 안 장관은 "우리가 30년 이상 기술 축적과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국내 건조가) 합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역시 "(한미) 정상 간 대화에서는 한국에서 짓는 것으로 논의한 사안"이라고 밝히며, '국내 건조'가 원칙임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 산업 재건'을 우선하는 미국과 '주권적 원잠 확보'를 목표로 하는 한국 간의 전략적 목표가 다름을 보여준다.
현실적 장벽: '역량, 법률, 산업'
필리조선소는 상선 전문 건조 시설로, 미 해군 함정, 특히 잠수함 건조 경험이 전무하다. WSJ조차 미국 내 건조 비용이 한국보다 4~5배 높다고 지적했으며, 미국 내 전문가들은 현 시설을 핵잠수함 건조용으로 개조하는 데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 분석한다.
미국 자체의 잠수함 산업 기반(SIB)이 이미 포화 상태인 것도 문제다. 현재 미국에서 핵잠수함을 '최종 조립'할 수 있는 곳은 제너럴 다이내믹스 일렉트릭 보트(GDEB)와 뉴포트 뉴스 조선소(NNS) 단 두 곳뿐이다. 이들은 자국 해군의 컬럼비아급 및 버지니아급 원잠 생산 차질로 이미 '심각한 병목 현상'을 겪고 있다.
미국의 엄격한 법률도 장벽이다. '원자력 에너지법'(AEA)은 미 해군의 원자력 추진 기술 이전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며, 한국은 AUKUS(미국, 영국, 호주 안보 동맹) 멤버가 아니다. 또한 '해외 소유·통제·영향'(FOCI) 규정은 외국 기업인 한화가 원잠의 1급 군사 기밀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 차단한다.
유력 시나리오: '투 트랙' 역할 분담
이러한 모든 제약 조건을 만족시키는 현실적 해법으로 '투 트랙'(Two-Track) 또는 '역할 분담' 전략이 가장 유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첫째, '한국형 원잠'(ROKN SSN)은 한국이 30년간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선체를 건조하고 , 미국은 AUKUS에 준하는 조치로 원자로, 핵연료 등 핵심 기술을 '블랙박스' 형태로 이전하는 방안이다. 이는 한국의 '주권적 원잠 확보' 목표를 충족시킨다.
둘째, 그 대가로 한화는 MASGA 펀드를 활용해 필리조선소를 미국 잠수함 산업 기반(SIB)의 핵심 공급망으로 재건한다. 이는 원잠 '최종 조립'이 아닌, 미국 SIB의 병목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적 아웃소싱'의 일환이다. 즉, FOCI 등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비(非)원자력 구획(압력 선체 블록 등)을 제작하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WSJ가 보도한 '연 2~3척'은 한국형 원잠이 아니다. 대신 한화가 필리조선소의 선진 자동화 기술을 활용해, 미국 해군(USN) 원잠 모듈을 '연 2~3척 분량'으로 생산해 GDEB와 HII에 공급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미국 SIB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한국은 원잠 기술을 확보하는 '윈-윈'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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