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저항 도구가 된 한글/KBS 유튜브 캡춰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의 고유 문자인 '한글'이 정부의 온라인 검열을 피하는 새로운 저항의 도구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K팝 등 한류의 영향으로 한글에 익숙한 세대가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현상으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위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검열 피하는 ‘한글 암호’…SNS 뒤덮은 비판 여론

지난 8월 25일부터 인도네시아에서는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 정부의 긴축 재정 기조와 국회의원 특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특히 자카르타 최저임금의 10배에 달하는 월 5천만 루피아의 주택 수당을 국회의원 580명에게 지급하기로 한 결정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이 폭발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인도네시아 당국은 정부 비판적인 온라인 게시물을 신속히 삭제하는 등 강력한 검열에 나섰다. 이에 시위대는 정부의 자동화된 키워드 기반 검열 시스템을 우회하기 위한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인도네시아어 문장을 발음 나는 대로 한글로 옮겨 적는 '음차(音借)' 방식이다.

소셜미디어(SNS)에는 한글로 작성된 정부 비판 게시물이 쏟아졌다. "팅갈 민따 마앞 트루스 등으린 락얏 아파 수샇냐."라는 한글 문구는 "그냥 사과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게 어렵나?"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더 나아가

"에망 끕므린따한 안징 방삿 스모가 쁘라보워 쯔빳 ㅁ닝갈"(정부는 개자식이다, 프라보워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과 같은 원색적인 비난과 "카가 비사 크르자 크르나 므레카 바냑 양 빠카이 이자사 빨수"(대부분 가짜 학위 소지자들이라 일을 할 수가 없다) 등 정치인들의 무능을 조롱하는 내용도 한글로 유포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한글을 아는 인도네시아인에게는 쉽게 해독되지만, 로마자 기반의 검열 시스템은 의미 없는 문자로 인식해 걸러내지 못한다. 사실상 한글이 시위대에게는 검열을 피하는 '암호' 역할을 하는 셈이다.

K팝 팬덤, 문화 소비자를 넘어 정치 행위자로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의 K팝 팬덤이 있다. K팝 열풍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젊은 세대는 자발적으로 한글을 학습했으며, 이는 한글이 저항의 문자로 채택될 수 있는 결정적인 토양이 되었다. 어학 플랫폼 '듀오링고'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세계적으로 한국어 학습 수요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인도네시아 K팝 팬덤은 단순한 문화 소비 집단을 넘어, 고도로 조직화된 디지털 정치 행위자로 진화해왔다. 이들은 2020년 미국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당시, 온라인 동원 기술을 활용해 인종차별 반대 해시태그를 점령하고 대규모 기부 운동을 벌이며 정치적 효능감을 학습했다.

이러한 경험은 국내 정치 문제로 이어졌다. 2020년 노동자의 권리를 축소하는 '옴니버스법' 반대 시위 당시, K팝 팬덤은 #TolakOmnibuslaw(옴니버스법을 거부하라)와 같은 해시태그를 전 세계적인 트렌드로 만들며 온라인 여론전을 주도했다. 당시 빅데이터 분석가 이스마일 파흐미는 "옴니버스법에 반대하는 최고 영향력자들의 트위터 아바타를 보면 K팝 아바타를 가진 계정이 대화를 지배했음이 분명했다"고 분석했다.

이중 전략: 국제 여론 환기 및 정부 압박

시위대가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검열을 피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국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이를 통해 자국 정부에 간접적인 압력을 가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다. "왜 인도네시아 시위에 한글이 등장하는가?"라는 외부의 질문 자체가 인도네시아의 억압적인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 것이다.

한편, 이번 시위에서 사용된 한글은 2009년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공식 문자로 채택한 사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찌아찌아족의 한글 도입이 언어 보존을 위한 공식적이고 문화적인 프로젝트였다면, 시위에서의 한글 사용은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위한 비공식적이고 전술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명확히 구분된다.

한류의 '소프트 파워'가 수용국에서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치적 저항의 도구가 된 이번 사례는, 디지털 시대에 국가의 통제와 시민의 저항이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글로벌 문화가 지역의 정치 지형과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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