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종묘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보도영상 캡춰


대한민국 최초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宗廟)의 경관을 둘러싼 중앙정부와 서울시 간 갈등이 외교적 위기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도한 종묘 인근 고층 재개발 계획이 세계유산 등재 취소라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면서, 국내법과 국제 규범의 정면충돌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서울시는 10월 30일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시보에 고시했다. 이 고시는 종묘와 약 180m 거리에 위치한 세운 4구역 재개발 사업지의 건물 최고 높이를 기존 71.9m(20층)에서 최대 145m(38~41층)로 약 두 배 가까이 상향 조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용적률도 660%에서 1008%로 약 1.5배 증가했다.

이에 대해 국가유산청(청장 허민)은 11월 3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즉각 반발했다. 국가유산청은 2009년부터 서울시와 10여 차례 이상의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71.9m라는 높이 기준을 설정했으며, 이는 장기간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된 결과라고 강조했다.

허민 청장은 11월 6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기간에 기습적으로 39층, 40층을 올린다고 변경 고시했다"고 서울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어 "(개발을 강행하면)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며 "(세계유산) 취소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고 경고했다.

갈등의 핵심은 법적 정당성과 국제 규범 준수의 충돌이다. 서울시는 세운 4구역이 종묘 외곽 경계로부터 180m 떨어져 있어, 서울시 조례상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규제 대상인 100m 이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대법원은 11월 6일 서울시의회가 2023년 10월 '100m 보존지역 밖이라도 문화재에 영향이 확실하면 검토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에 대해 "법령 위반이 아니다"라며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조감도./서울시 자료


반면 국가유산청은 100m라는 국내법적 기준보다 '세계유산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특별법' 및 유네스코 협약에 따른 '세계유산영향평가(Heritage Impact Assessment, HIA)' 절차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네스코는 올해 4월 서울시에 서한을 보내 세운지구 계획이 종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며 HIA 실시를 공식 요청했으나, 서울시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고시를 강행했다.

허민 청장은 "이것은 100m냐 180m냐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고층 빌딩이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근거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를 훼손하느냐가 핵심이라고 밝혔다. 종묘의 OUV는 건축물 자체뿐 아니라 그 장엄함과 독자적인 건축 경관을 포함한다.

이번 사태는 1995년 종묘 등재 당시의 국제적 약속을 파기하는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1994년 10월 등재 심사 보고서에서 "세계유산 구역 내 시야(sight-lines)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에서의 고층 건물 인허가는 없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권고했다.

문화유산위원인 강동진 교수는 서울시가 "한양도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종묘 앞에 초고층 빌딩군 재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서로 상치되는 이율배반적인 행보"라고 비판했다. 서울시는 2017년 한 차례 등재가 좌절된 한양도성을 202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재추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2021년 '영국 리버풀 해양산업도시' 사례를 우려하고 있다. 리버풀은 19세기 항구 유산 인근의 과잉 재개발 계획으로 인해 유산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됐다. 당시 리버풀 시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재개발을 밀어붙인 논리는 20년간 지연된 사업의 경제성을 내세우는 현재 서울시의 논리와 유사하다.

이번 개발 계획은 오세훈 시장의 '녹지생태도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는 박원순 전 시장 시기 추진된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세운상가군을 보존하고 재생하는 방식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상가군을 단계적으로 철거 및 공원화하고 민간 재개발을 통해 고밀도 업무 및 주거 시설을 공급하는 전환 방식을 택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대법원 판결로 국내법적 제동 수단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및 ICOMOS와 긴밀히 소통하며 국제 여론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시가 개발을 강행할 경우, 국가유산청은 유네스코에 당사국 보고서를 통해 이 문제를 공식 안건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차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대한민국 종묘의 보존 상태가 공식 논의되는 국가적 외교 문제로 비화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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