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 외환시장의 기대 변동성이 1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시장의 안정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이면에는 심각한 구조적 위험이 잠복해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는 9일 시카고상업거래소(CME) 그룹의 'CVOL 인덱스'가 1년래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 데이터를 살펴보면 달러화의 현 상황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달러인덱스(DXY)는 2024년 11월 5일 미국 대선 당일 103.37을 기록한 뒤, 올해 1월 13일 110.18까지 급등했다가 상반기에만 10.7% 급락했다. 11월 10일 현재 DXY는 99.64 수준으로, 12개월 기준 5.52% 하락한 상태다.
현재의 낮은 변동성은 올해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선언한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 충격 이후 7월 주요국과의 양자간 무역 합의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제거된 데 따른 것이다. 미국-유럽연합(EU) 합의(7월 27일), 미-일본 합의(7월 24일), 그리고 미-한국 합의가 연쇄적으로 타결되면서 단기 정책 불확실성이 크게 낮아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 선회도 달러 약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연준은 9월과 10월 두 차례 연속 금리를 인하해 현재 기준금리를 3.75~4.00%로 낮췄다.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보다 급격히 냉각되는 고용시장을 우선시한 결과다. 시장은 12월 25bp(베이시스포인트) 추가 인하 가능성을 67%로 반영하고 있다.
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예금금리를 2.00%로 동결하며 확고한 매파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행(BOJ)도 미세한 긴축 신호를 보내고 있다. 임금 상승과 기업의 가격 전략 변화로 일본의 2025 회계연도 근원 인플레이션 전망치가 2.7%로 상향 조정되면서, 시장은 12월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 자문위원회(TBAC)는 11월 4일 보고서에서 "주요 미국 경제 데이터가 지연됨에 따라, 진행 중인 정부 셧다운(government shutdown)이 금융시장의 변동성 부족에 기여하고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현재의 낮은 변동성이 경제의 진정한 안정이 아니라 시장이 판단할 재료가 없는 인위적 소강상태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의 경우 7월 한미 무역 합의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여기에는 조선업 협력 1,500억 달러가 포함된다. 이는 25% 이상으로 위협받던 관세율을 15% 수준으로 안정시키는 대가였다. 관세 안정성을 확보했지만, 막대한 규모의 해외 투자 약속은 지속적인 자본 유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11월 현재 원화는 달러당 1,450원을 넘어서며 7개월 만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 정부회계감사원(GAO)은 2월 보고서에서 미국의 재정 미래가 '지속 불가능하다(unsustainable)'고 공식 경고했다. 연방 부채는 2027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106%에 도달할 전망이며, 연방 적자는 2025년 GDP의 6%에서 2027년 6.9%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 분석기관 컨베라(Convera)는 연준이 "막대한 부채 부담을 관리해야 하는 정부의 필요에 의해 정책이 영향을 받는 '재정 지배(Fiscal Dominance)의 새로운 시대'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트럼프 행정부 일부 고위 관료들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부담(burden)'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 대통령 경제자문(CEA) 위원이자 연준 이사는 "미국이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준비자산을 쌓기 위해 미 국채를 수출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이는 무역 불균형을 초래하는 '지속적인 달러 고평가'를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달러 무기화'에 대한 글로벌 대응도 이미 시작됐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 특히 중국·터키·인도 등은 미국 달러에서 벗어나 자산을 다각화하기 위해 기록적인 수준으로 금을 매입하고 있다. 중국 위안화(CNY)의 글로벌 SWIFT 결제 비중도 상승하고 있으며, 더 많은 상품 무역이 비달러화로 결제되고 있다.
상품 시장의 극명한 분기도 주목할 만하다. 금은 달러 약세와 중앙은행 매입, 지정학적 불안에 힘입어 올해 기록적인 랠리를 펼치며 현재 온스당 4,000달러 선을 넘나들고 있다. 반면 유가는 올해 내내 하락세를 보이며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주요 투자은행들은 2026년에도 미국의 성장 둔화, 연준의 완화 기조 등으로 달러화의 완만한 약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JP모건(J.P. Morgan)은 유로·달러 환율이 내년 3월 1.22달러까지 상승(달러 약세)할 것으로 예상하며, DXY는 97~98 수준에서 움직일 것으로 내다봤다.
블랙록(BlackRock)은 '글로벌 무역 보호주의'를 가장 가능성 높은 '높은(High)' 위험으로 분류했다. 7월의 무역 휴전은 임시방편일 뿐,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여전히 높은 상태이며 이는 공급망 파편화와 글로벌 효율성 저하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 지역 분쟁 격화, 미중 전략 경쟁 등 지정학적 위험도 변동성을 즉각적으로 높일 수 있는 요인이다.
한국은행(BOK)은 현재 기준금리를 2.50%로 동결하고 있다. 미 관세 정책으로 인한 수출 둔화 전망과 건설 투자 급감(-8.1%) 등 경기 둔화에 대응해 금리 인하를 고려해야 하지만, 높은 가계부채와 서울의 주택 가격 상승이라는 금융 안정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연준의 금리 인하로 미-한 금리차가 확대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이 가중되고 있어, 한국은행은 경기 부양과 환율 방어 사이에서 정책적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낮은 변동성을 '기만적인 고요'로 진단하며, 2026년 이후 본격화될 무역 파편화·재정 위기·지정학적 충격파에 대비해 정책적 완충 장치와 경제적 회복탄력성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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