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LG·두산 4대 그룹이 동시다발적으로 AI 중심 전략을 선언/AI 편집
한국의 주요 재벌들이 인공지능(AI)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한국 기업들이 전례없는 '협공'에 직면한 가운데, 삼성·SK·LG·두산 등 4대 그룹이 동시다발적으로 AI 중심 전략을 선언하며 돌파구 마련에 나섰다.
구광모 LG 회장은 "중국 경쟁사들은 우리보다 자본, 인력에서 3배, 4배 이상의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고 위기감을 표했으며, 최태원 SK 회장은 "구성원 개개인이 AI를 친숙하게 가지고 놀 수 있어야 혁신과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지원 두산 부회장 역시 "활용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AI를 접목해야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절박감을 드러냈다.
미국 압박과 중국 추격의 이중고
한국 기업들의 위기감은 현실적 근거에 기반한다. 미국의 반도체 과학법(CHIPS Act)은 미국 정부 지원을 받는 기업이 향후 10년간 중국에서 첨단 반도체 시설을 신설하거나 확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중국에 대규모 레거시 팹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역시 전기차 세액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 배터리 부품과 핵심 광물의 엄격한 원산지 규정을 요구하며, 사실상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한국 배터리 제조사들은 기존 공급망을 전면 재편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한편 중국은 '중국제조 2025' 전략을 통해 10년간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10대 핵심 육성 분야 중 최소 7개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을 배출했으며, 전기차(BYD), 배터리(CATL), 드론(DJI), 5G 통신(화웨이) 등이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4대 그룹, 각기 다른 AI 전략으로 승부
삼성은 '모두를 위한 AI'를 표방하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축에서 AI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전영현 부회장이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으로 복귀한 가운데, HBM(고대역폭 메모리)과 파운드리 사업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노태문 DX부문장은 "전 업무 영역의 90%에 AI를 적용"하여 'AI 기반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삼성은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 원, 국내 첨단 산업 전반에 360조 원을 투자하는 장기 계획을 추진 중이다. 특히 구글과의 전략적 동맹을 통해 생성형 AI 모델 '제미나이'를 삼성 하드웨어에 최적화하여 갤럭시 AI부터 미래 XR 헤드셋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직접 이끄는 '소버린 AI' 구축에 나섰다. 그룹은 AI와 반도체 사업에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전체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는 '리밸런싱'을 단행하며, 2026년까지 AI 및 반도체 분야에 80조 원을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선두 지위를 바탕으로 울산에 '제조 AI 허브'를 위한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를 설립하고 있다.
LG는 구광모 회장이 제시한 'ABC' 전략(AI, 바이오, 클린테크)의 핵심인 'AI 전환(AX)'을 추진한다. 2026년까지 국내에 106조 원을 투자하며, 이 중 48조 원을 AI를 포함한 미래 성장 분야 R&D에 투입한다. LG AI연구원에서 개발한 독자적인 초거대 AI 모델 '엑사원'을 그룹 계열사 전반에 활용하고 있으며, LG디스플레이는 AI 생산 체계 도입으로 연간 2000억 원 이상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었다.
두산은 박지원 부회장이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피지컬 AI' 전략을 구사한다. 로봇이나 건설기계 등 물리적 하드웨어를 제어하는 고도화된 AI 기술에 특화하며, 지주사 내 전담 조직인 'PAI 랩'을 신설했다. 경영진이 직접 미국을 방문해 아마존, 엔비디아 등과 파트너십을 모색하고,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 AI 연구소와 산업재 기업 최초로 협력을 체결했다.
정부도 AI 강국 전략으로 뒷받침
정부는 2019년 'IT 강국을 넘어 AI 강국으로'라는 비전 아래 범정부 차원의 '인공지능 국가전략'을 수립했다. AI 인프라 확충, 세계 최고 수준의 AI 기술력 확보, 활기찬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을 3대 축으로 하는 이 전략은 민간 부문이 혁신을 주도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제공하고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정부는 AI 학습용 데이터 활용을 가로막는 규제 완화에 총력을 기울이며, 저작물 공정 이용 가이드라인 마련, 공공데이터 개방에 대한 공무원 면책 조항 신설 등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또한 '인공지능 기본법' 제정을 통해 기업들에게 법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AI 기술의 사회적 위험을 관리하는 균형 잡힌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인재 부족이 최대 과제
AI 전환의 가장 큰 병목 현상은 숙련된 AI 인재의 절대적 부족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SK그룹은 CEO, CFO 등 최고위 경영진 100여 명을 대상으로 하는 'AI 리더십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최태원 회장이 직접 기획한 사내 교육 플랫폼 '마이써니'를 통해 전 임직원 대상 AI 교육을 확대하고 있다.
LG그룹의 'LG 에이머스' 프로그램은 전국 대학생과 청년 수만 명에게 LG의 실제 산업 데이터를 활용한 석사급 수준의 실무 AI 역량을 교육하는 대규모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LG 계열사의 인재 채용과 직접 연계되어 교육과 채용을 잇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
현실과 이상의 격차 여전
화려한 발표와 달리 산업 현장에서의 AI 도입 현실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내 중소·중견 제조기업의 제조 AI 도입률은 0.1%에 불과하며, '스마트 공장'을 도입한 기업들 중에서도 75.5%는 데이터의 단순 수집 및 모니터링 수준인 기초 단계에 머물러 있다.
높은 초기 투자 비용과 불확실한 투자수익률, 오래된 공장 설비에서 양질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통합하는 인프라의 부재, 그리고 AI 기술과 해당 산업의 특성을 모두 이해하는 융합형 인재의 부족이 주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위계질서와 관료주의에 기반한 조직 문화 역시 AI 전환에 필요한 민첩하고 실험적인 문화를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로 지적된다. 한국의 재벌들은 경직된 조직 구조를 유연한 '애자일' 모델로 전환해야 하는 거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제3의 길을 통한 기술 주권 확보
전문가들은 한국 주요 기업들의 AI 전환이 지정학적 압박에 대한 수동적 방어를 넘어 21세기 글로벌 경제에서 한국의 역할을 재정의하기 위한 능동적 미래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한국이 미국과 중국의 기술 스택에 대한 완전한 종속을 거부하고, 대신 산업 AI와 이를 구동하는 핵심 하드웨어라는 특화된 영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기술 주권'을 확보하려는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시도로 평가된다.
HBM 메모리(SK), 첨단 파운드리 공정(삼성), AI 기반 스마트 제조(LG), 지능형 로보틱스(두산) 등 핵심적인 틈새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은 글로벌 AI 공급망에서 누구도 쉽게 소외시킬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될 전망이다.
격화되는 글로벌 경쟁, 막대한 자본 투자 부담, 내부 조직 문화의 저항,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적 변수 등 극복해야 할 과제가 산적하지만, 이 AI 기반 대전환이 성공한다면 향후 수십 년간 한국의 경제적 번영과 전략적 자율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G2 시대의 다른 중견국들에게 강력한 생존 모델을 제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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