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랑겔 휩스 주니어 대통령은 구스타프 아이타로 팔라우 국무장관과 조엘 에렌드라이히 주팔라우 미국 대사 간의 외교 문서 교환식을 참관했다. (2024년 3월)/팔라우 정부 홈페이지 자료
남태평양의 팔라우(Palau)가 미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대가로 미국 내 제3국 이민자를 수용하기로 합의하면서 지역 내 파문이 일고 있다. 인구 1만8천 명인 이 나라가 내린 고육지책의 배경에는 파산 직전에 몰린 공무원 연금 기금과 관광 산업 회복 지연이라는 절박한 경제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수랑겔 휩스 주니어(Surangel Whipps Jr.) 팔라우 대통령과 크리스토퍼 랜도(Christopher Landau)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 24일 통화를 통해 양해각서를 최종 확정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팔라우는 범죄 기록이 없는 제3국 국민 최대 75명을 개별 심사를 거쳐 수용하게 된다. 미국은 그 대가로 공공 서비스 확충에 750만 달러, 연금 개혁 지원에 600만 달러, 안보 지원에 200만 달러 등 총 1550만 달러를 지원하고 신규 병원 건설도 약속했다.
이번 결정의 직접적 배경은 팔라우 공무원 연금 기금의 붕괴 위기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연금 기금은 매년 약 600만 달러를 징수하지만 지급액은 1000만 달러에 달해 연간 400만 달러의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특단의 조치가 없을 경우 5~6년 내 기금이 완전히 고갈될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이 이미 배정한 2000만 달러의 연금 지원금은 팔라우 의회가 실질적인 개혁안을 통과시키기 전까지 동결된 상태다.
관광 산업의 더딘 회복도 팔라우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방문객은 5만899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3% 증가했으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이 1만6757명으로 전체의 33%를 차지하며 최대 시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팔라우의 대만 수교 유지를 이유로 언제든 관광객 송출을 중단할 수 있는 카드를 쥐고 있다.
휩스 대통령은 이번 합의를 두고 "팔라우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울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하며, 건설 노동자나 간호사 같은 특정 기술 보유 인력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수용 대상자들이 "범죄 기록이 없는" 인물들로 제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팔라우 내부의 반발은 거세다. 호콘 바울레스(Hokkon Baules) 상원의장과 깁슨 카나이(Gibson Kanai) 하원의장은 지난 7월 미국의 첫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공동 서한을 통해 "우리는 미국의 강력한 파트너이지만, 우리가 이행할 수 없는 약속을 할 수는 없다"며 이를 단호히 거부한 바 있다. 전통 지도자 협의회도 인구 1만8천 명의 소규모 사회에 미칠 사회적 충격을 우려하며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야당과 의회는 이번 협정이 의회 비준 없이 진행된 점을 들어 절차적 정당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바울레스 의장은 "사회적 합의 없는 이민자 수용은 국가의 미래를 저당 잡히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전통 추장 협의회는 더욱 직설적으로 "미국은 우리의 친구지만, 우리를 쓰레기 하치장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번 협정은 트럼프 2.0 행정부의 이민 정책 외주화 전략과 팔라우의 경제적 절박함이 맞물린 결과로 분석된다. 미국은 과거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과 체결했던 망명 협력 협정 모델을 태평양 지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동시에 팔라우는 미군의 태평양 방어선인 제2도련선의 핵심 거점으로, 미국은 장거리 레이더 기지를 운용하며 중국의 군사적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
팔라우 주별 행정구역/팔라우 정부 홈페이지 자료
중국은 이번 협정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이미 팔라우의 대만 수교 유지에 대해 관광객 제한 등의 압박을 가해왔다. 팔라우가 미국의 이민 정책까지 적극 지원하는 모양새가 되면서, 중국이 남은 경제적 레버리지를 활용해 압박을 강화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만은 팔라우와 미국 간 관계 밀착을 환영하는 동시에 팔라우 내부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린자룽(Lin Chia-lung) 대만 외교부장은 지난 12월 팔라우를 방문해 골프장 건설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관광 협력을 약속했다. 이는 팔라우가 중국의 경제적 압박에 흔들리지 않도록 미국과 보조를 맞춰 안전망을 제공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인구 1만8천 명 사회에서 75명의 이민자는 전체 인구의 0.4%에 해당한다. 팔라우는 이미 주택 부족과 상하수도 노후화 문제에 시달리고 있어, 이민자 거주지 마련 문제가 지역 주민과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휩스 대통령의 안전 공약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는 강대국 간 경쟁의 최전선에 선 소국들이 직면한 딜레마를 생생히 보여준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달러가 팔라우 경제의 숨통을 틔워주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대미 의존도를 심화시키고 주권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태평양 도서국들이 기후 변화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지정학적 압박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팔라우 #미국이민정책 #태평양전략 #연금위기 #미중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