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생성 이미지/외교신문


겨울의 한복판, 토요일 오후의 볕이 잠시 영상(零上)의 온기를 허락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따뜻한 물을 물통에 가득 담아 계단을 내려갔다. 얼룩진 자동차를 닦아내기 위해서다. 다가올 일요일, 예배당으로 향하기 위한 정갈한 준비 의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차는 침묵했다. 배터리가 방전된 자동차는 심장이 멈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물어가는 잿빛 하늘 아래, 긴급출동 기사님의 도움으로 겨우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오 년이나 되었으니 이제는 심장(배터리)을 바꾸셔야 합니다.” 겨울마다 마주쳐 어느덧 단골이 된 ‘미스터 미소’ 기사님은 몇 번의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한 시간은 족히 달려야 다시 시동이 꺼지지 않는다는 말에, 어둠이 내려앉은 밤길을 나섰다. 어디로 핸들을 꺾을까 망설이다 무의식처럼 향한 곳은 청와대 가는 길이었다. 마침 오는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용산 시대를 뒤로하고 다시 청와대로 입성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터였다.

내가 자하문 밖으로 이사를 온 후, 청와대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다. 잠시 머물다 떠난 윤석열 대통령의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다섯 번의 계절이 권력의 이름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아스팔트 위가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굴곡진 노래와 이야기가 깃든 역사의 혈관 같은 곳이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위로 지난 시간들이 겹쳐 보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던 날, 나는 그 마지막 뒷모습을 배웅하기 위해 이 길을 찾았었다. 자하문 밖에서 창의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길목, 무궁화공원 옆을 지날 때면 으레 검문소의 헌병이 앞을 막아서곤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 딱딱한 물음에 나는 때로는 “운동하러 갑니다”, 때로는 “집에 갑니다”라고 답하며 그 삼엄한 경계를 넘곤 했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 시절, 검문소가 사라지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그 길을 거닐게 되었을 때 느꼈던 그 생경한 해방감은 아직도 선명하다.

기억은 더 먼 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광화문의 찬 바닥을 끝없이 걸었던 날들, 소통을 거부한 채 거대한 벽처럼 서 있던 ‘명박산성’과 살을 에는 물대포의 기억,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외치며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던 그 치열했던 겨울밤들.

역사는 그렇게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의 가슴속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흘러왔다. 그리고 이제 내일이면, 이재명 정부가 다시 청와대의 문을 연다.

오랫동안 적막 속에 잠겨 있던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다시금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민주주의의 불빛이 켜지는 순간이다. 부디 새롭게 켜지는 그 불빛이 춥고 어려운 이들의 언 가슴을 녹이는 희망의 난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수백 년 풍상을 견뎌온 청와대 초입의 고목들도,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 가지를 펴고 새로운 대통령의 입성을, 그리고 다시 시작될 역사의 봄을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멈췄던 자동차의 심장이 다시 뛰듯, 우리 사회의 심장도 다시 힘차게 박동하기를. 어둠 내린 청와대 길을 달리며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청와대를 지나며

조정애

불꺼진 어둠 속에서
북악산 아래 창의문 길을 돌아
무궁화 공원에서 회화나무를 찾는다
따뜻한 아랫목 불 지펴 놓고
찬 손 잡아주던 다정한 불빛을 찾아
여기 적막한 길목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누구를 기다렸는가

궁궐 위로 떠오르는 해와
변함없이 바라보는 달빛 아래
조선 왕의 행렬과
수많은 대통령을 지켜본
수백년 넘는 고목들이
다시 잠에서 깨어나
역사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세상에 다시 불을 밝히는 자 누군가
이제는 분노하지 않으리
서럽고 추운 사람들이
귀한 주인이 오시는 길을
마음을 다해 마중할 때에
인왕산 돌아 청와대 지나는 길이
오늘밤 찬 별빛도 따뜻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