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의 기술 봉쇄에 맞서 1,000억 위안(약 20조 6,000억 원) 규모의 국가 창업투자 인도기금(National Venture Capital Guidance Fund) 운용을 26일 공식 개시했다. 이는 단순한 산업 지원을 넘어 국가 자본 배분 시스템 전체를 기술 자립 목표에 종속시키는 체제 전환의 신호탄이다.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발개위)와 재정부는 이날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금의 등록 절차와 관리 제도 수립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기금은 재정부가 발행한 초장기 특별 국채로 조달되며, 지방 정부와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최종적으로 1조 위안(약 206조 원) 규모의 투자 효과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장 주목할 점은 일반 벤처캐피털이 7~10년 존속 기한을 두는 것과 달리, 이 기금이 총 20년의 운용 기한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초기 10년은 투자 기간, 후반 10년은 회수 기간으로 나눠 장기적 관점에서 기술 개발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발개위는 "인내하는 자본(Patient Capital)을 통해 초기 단계 스타트업의 기술 상용화를 지원하겠다"고 설명했다.
◆ 기금 자금의 70% 이상 초기 기업 집중 투자
기금 운용 구조는 중앙의 기금회사에서 지역기금, 그리고 수백 개의 자(子)기금으로 이어지는 3층 구조로 설계됐다. 발개위에 따르면 향후 3개 주요 지역에 600개 이상의 자 기금을 조성해 반도체, 인공지능(AI), 항공우주, 양자 기술 등에 투자할 계획이다.
투자 대상은 명확하다. 전체 자금의 70% 이상을 시드 단계 및 초기 단계 기업에 의무적으로 투자하도록 규정했으며, 기업 가치는 5억 위안(약 1,032억 원) 미만으로 제한했다. 단일 투자 금액도 5,000만 위안(약 103억 원) 이하로 설정해 이미 성장한 대기업보다는 기술 잠재력을 가진 작은 거인 기업들을 발굴하겠다는 전략이다.
지역별로는 징진지(베이징·톈진·허베이), 창장(양쯔강) 삼각주, 웨강아오(광둥·홍콩·마카오) 대만구 등 3대 경제 권역에 대규모 지역 기금을 설립했다. 징진지 지역 기금은 중국국제금융공사(CICC) 자회사가 운용하며 국가 출자 비중이 67%로 가장 높다. 총 규모는 296억 위안에서 시작해 500억 위안 이상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창장 삼각주 지역 기금은 국가개발투자공사(SDIC) 자회사가 운용하며 초기 출자액은 471억 위안이다. 이 기금은 집적회로, 바이오 의약품, 양자 기술 분야에 집중 투자한다. 웨강아오 지역 기금은 선전캐피털그룹이 운용하며 국가 출자 비중은 44%로 상대적으로 낮다. 초기 출자액은 450억 위안이며, 홍콩의 금융 네트워크와 연계해 글로벌 시장 진출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 민간 투자 급감 속 국가가 최후의 투자자로
이번 기금 출범의 배경에는 중국 벤처 투자 시장의 급격한 위축이 있다. 2024년 중국의 벤처캐피털 자금 조달은 전년 대비 32% 급감해 330억 달러 수준으로 추락했다. 부동산 시장 붕괴와 지방 정부 부채 문제로 민간 투자자들이 관망세를 보이는 가운데, 국가가 직접 나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판단이다.
중국 정부는 과거 2014년부터 운용해 온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대기금) 모델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대기금은 대규모 자금이 특정 대기업과 제조 설비 확충에 집중되면서 부패 스캔들을 유발했고, 차세대 기술 확보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인도기금은 초기 단계 소규모 기업에 분산 투자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중국 민간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의 부상과 이 기금의 관계다. 딥시크는 국가 지원 없이 민간 자본만으로 미국 오픈AI(OpenAI)와 대등한 수준의 대규모 언어 모델을 개발해 주목받았다. 그러나 딥시크의 성공은 중국 정부가 조성한 데이터 인프라, 국가 컴퓨팅 자원, 엘리트 교육 시스템이라는 생태계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한국, 규모의 열세 속 전략적 대응 시급
한국 정부는 2026년을 'AI G3 도약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AI 관련 예산을 전년 대비 3배 증액한 10조 1,000억 원 규모로 편성했다. 그러나 중국의 수백조 원 규모, 미국의 민간 투자 150조 원 이상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규모 차이가 존재한다.
더 큰 우려는 중국의 반도체 자립화가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이다. 중국이 창장 삼각주 기금을 통해 집적회로 국산화에 성공한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하는 레거시 공정 반도체 시장에서 가격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산 장비와 중간재의 대중 수출이 급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 주도의 기술 동맹에 참여하면서도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정교한 균형 외교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국민연금이나 한국투자공사 같은 국부 펀드를 활용한 장기 기술 투자 펀드 조성도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중국의 국가 창업투자 인도기금은 단순한 산업 정책이 아니라 기술을 국가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권위주의적 모델의 물적 토대다. 한국은 이에 맞서 기술 발전의 목표를 인간의 존엄성 증진에 두는 인간 중심 기술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AI 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혁신과 안전을 조화시키는 규범을 만들고, 복지·교육·의료 격차 해소 같은 따뜻한 기술 분야에서 소프트 파워를 강화하는 것이 중국산 기술과의 차별화 전략이 될 수 있다.
중국의 거대한 자본이 이 20년이라는 긴 호흡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에게 필요한 것은 규모의 경쟁이 아니라 민첩함과 연대, 그리고 인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명확한 기술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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