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미국 달러화 가치가 2017년 이후 최대 폭으로 하락하면서 전후 70년간 지속된 달러 중심 금융 질서에 균열이 생겼다. 달러화는 주요 통화 대비 약 9.5~9.6% 하락했고, 반대로 유로화는 14% 가까이 급등해 1유로당 1.17달러 선을 돌파했다. 영국 파운드화 역시 1파운드당 1.36달러로 상승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달러 약세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상호관세 정책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사이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이 강행한 상호관세 정책은 달러 가치를 일시적으로 15%까지 급락시켰다. 9월부터 시작된 연준의 금리 인하는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의 금리 동결 기조와 대비되며 달러 약세를 가속화했다.
ING의 제임스 나이트리(James Knightley)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 연준은 글로벌 중앙은행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으며, 여전히 강경한 통화완화 모드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차기 연준 의장으로 유력한 케빈 해싯(Kevin Hassett)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의 지명 가능성도 시장 불안을 키우고 있다. 예측 시장 칼시(Kalshi)와 폴리마켓(Polymarket)에 따르면 해싯의 지명 확률은 72~86%에 달한다.
해싯은 트럼프 대통령의 저금리 정책을 지지하는 대표적 비둘기파로 알려져 있다. 나이트리 이코노미스트는 차기 의장이 "본능적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릴 경우 한층 더 개입주의적이며 공격적인 금리 인하 성향을 보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직 미 재무부 관료이자 싱크탱크 OMFIF 의장인 마크 소벨(Mark Sobel)은 "트럼프 대통령이 달러 패권의 근간을 훼손하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진행되겠지만, 이는 시장 참가자들에게 여전히 심리적 압박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상호관세 정책의 역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 행정명령 14257호를 통해 상호관세 정책을 공식화했다. 이 정책은 상대국이 미국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만큼 미국도 똑같이 부과한다는 기계적 상호주의에 기반한다. 모든 수입품에 기본 10% 관세를 부과하되, 상대국 관세율이 더 높으면 그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세율을 상향 조정하는 방식이다.
중국에는 34% 이상의 관세가 적용됐고, 유럽연합(EU)에는 철강과 알루미늄, 자동차에 추가 관세 위협이 이어졌다. 한국은 7월 발표되고 11월 확정된 한미 전략적 무역 투자 딜을 통해 관세율을 최대 15%로 제한받았다. 이는 조선, 에너지, 반도체, 제약 분야에서 대규모 대미 투자를 약속한 대가였다. 특히 조선업 분야에서만 1,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승인됐다.
한국 내에서는 이 딜이 "충격적일 정도로 불평등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막대한 자본을 미국에 투자하고도 관세 면제가 아닌 인하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악의 시나리오인 30~50% 관세를 피하고 수출 물량을 유지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인 방어였다는 평가도 있다.
◆ 수출 호황 속 원화 약세의 미스터리
한국은 올해 사상 최대 수출 실적을 거뒀다. 관세청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연간 수출액은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6위 수출국 위상을 굳혔다. 1월부터 11월까지 반도체 수출은 1,526억 달러로 전년 대비 19.8% 급증했다. 자동차 수출은 660억 달러, 조선업은 290억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28.6%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인 달러당 1,480원 선까지 추락했다. 경상수지 흑자가 통화 강세로 이어져야 한다는 경제학적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이례적 상황이다.
원화 약세의 주된 원인은 자본 유출이다. 한국 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장벽을 우회하기 위해 미국 내 직접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렸다. 2024년 말 기준 대미 누적 직접투자는 5.7조 달러에 육박했다. 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국내로 환전하지 않고 현지 재투자에 사용하면서 외환 시장에 달러 공급이 차단됐다.
국민연금의 해외 자산 배분 확대와 개인 투자자들의 미국 기술주 매수 열풍도 구조적인 달러 수요를 창출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긴장과 국내 정치 불확실성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 매도를 부추겼다. 12월 중순에만 외국인은 한국 주식 2조 원어치를 매도하며 원화 약세를 가속화했다.
◆ 가치의 위기와 외교적 해법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는 경제적 비용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 간 자유로운 교역은 평화와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기반이다. 그러나 올해의 무역 전쟁은 경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전락시키고 각국을 배타적 민족주의로 몰아넣고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이러한 경제적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속화한다고 경고한다.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은 전 세계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경제는 물처럼 흘러야 한다. 트럼프의 관세 장벽은 흐르는 강물에 억지로 댐을 쌓는 것과 같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저수지에 자본이 고여 풍요로워 보일 수 있으나, 하류 국가들은 자본 유출과 경기 침체에 시달리게 된다.
한국은 실리와 명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국내로 가져올 수 있도록 과감한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를 단행해야 한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배터리 등 핵심 기술을 보유한 국가로서 미국뿐 아니라 EU, 일본, 대만 등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기술 연대를 주도해야 한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협력하되, 자유 무역과 다자주의 질서 회복을 위한 목소리를 국제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내야 한다.
수출입은행은 내년 말 원화 환율이 1,400원대에서 등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차기 연준 의장으로 해싯이 취임할 경우 금리 인하 기조는 더욱 강화될 것이며 달러 약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수출 대국이라는 성적표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통화 주권을 지키고 무역 이익이 국민에게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를 복원하며 품격 있는 중견국으로서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는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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