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청이 2025년 7월 이달의 재외동포로 사할린 동포의 귀환운동을 주도하고 이산가족 상봉 실현에 헌신한 박노학 전 사할린억류귀환한국인회 회장을 선정했다고 15일 발표했다.
박 전 회장은 191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인 1943년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됐다. 1945년 해방 후에도 무국적 상태로 사할린에서 억류된 상태로 생활하다가 일본인과 결혼해 1958년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후 평생을 바쳐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를 알리고 이들의 고국 귀환을 촉구하는 데 헌신했다.
박 전 회장은 일본 정착 후 자신의 단칸방을 사무실 삼아 귀환운동단체인 화태 억류귀환한국인회를 창설했다.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탄원서와 진정서를 작성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기관에 제출하는 등 사할린 동포의 귀환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던 동포들을 위해 그는 '우편배달부' 역할을 자처했다. 당시 한국과 구소련은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우편을 통한 서신 왕래가 불가능했다. 이에 박 전 회장은 일본에서 사할린 동포들의 편지를 받아 이를 다시 한국에 사는 장남 박창규씨에게 보내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사할린 동포들 사이에서 "박노학에게 부탁하면 가족을 찾아준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편지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고, 30여년 동안 박 전 회장 부자가 전달한 편지는 3만여통에 달한다.
박 전 회장은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사할린 동포들의 국적·지역·귀국 희망 형태 등을 기록한 이른바 '박노학 명부'를 만들었다. 약 7천명이 수록된 이 명부는 사할린 동포의 귀환 의지를 공식적으로 집계한 최초의 기록물로, 한국과 일본, 구소련 3국의 사할린 동포 관련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증거 자료로 활용됐다.
그는 사할린 동포의 귀환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선 고국의 가족과 상봉을 위해 일본 정관계 등 인사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등 다방면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정치인 등과 협력해 구소련 당국을 설득했고, 1984년 사할린 동포 10명의 일본 방문과 가족 상봉을 최초로 성사시켰다. 이는 전후 최초의 사할린 동포 공식 출국으로 귀환 운동의 물꼬가 됐다.
박 전 회장은 초청 대상자 선별, 숙소 마련, 통역 등을 모두 자비로 도맡았으며, 그의 좁은 다다미방은 이산가족이 눈물로 다시 만나는 공간이 됐다. 이후 그는 한국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오기 어려운 경우를 고려해 사할린 동포들이 일본을 경유해 모국을 방문하는 상봉 방식을 제안했다. 1988년 6월 일본 의원단이 구소련을 방문해 이같은 방식을 요청했고, 같은해 9월 일본을 경유한 가족 상봉이 처음으로 성사됐다.
이런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사할린 동포들의 가족 상봉은 오늘날 우리 정부의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으로 연결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88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이상덕 재외동포청장은 "박노학 전 회장은 일제 강점기 강제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진 못한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식민 피해,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고통받은 이들을 위로한 진정한 선구자였다"며 "일평생을 바쳐 사할린 동포사에 한 획을 그은 그의 삶을 기리기 위해 이달의 재외동포로 선정한다"고 밝혔다.
재외동포청은 대한민국 발전 또는 거주국 내 한인 위상 제고에 기여한 동포를 발굴해 매월 '이달의 재외동포'로 선정·발표하고 있다. 3월 김평진 전 재일제주개발협회장, 4월 홍명기 전 M&L Hong 재단 이사장, 5월 임천택 독립운동 지사, 6월 박병헌 전 재일민단 단장에 이어 박노학 전 회장이 7월 이달의 재외동포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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