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원자력이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서의 첫 수출 쾌거 이후, 기술력과 안전성을 앞세워 유럽과 아프리카 시장까지 성공적으로 진출하며 글로벌 원전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나 연이은 수주 낭보의 화려함 이면에는 해묵은 내부 갈등과 예측 불가능한 정치적 변수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외형적 성장과 함께 내실을 다져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모든 것의 시작: UAE 바라카 프로젝트의 명과 암
한국 원전 수출 역사의 서막을 연 것은 2009년 12월 한국전력공사(KEPCO) 컨소시엄이 따낸 UAE 바라카 원자력 발전소 사업이었다. 약 200억 달러 규모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한국형 원전(APR1400) 4기를 건설해 UAE 전력 수요의 최대 25%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대역사를 성공으로 이끈 동력은 ‘팀 코리아’ 모델이었다. 주계약자인 한국전력을 중심으로 한국수력원자력(KHNP, 운영 및 EPC 일부), 한전기술(설계), 두산에너빌리티(원자로계통설비), 현대건설과 삼성물산(시공) 등 국내 원자력 산업의 핵심 주체들이 총망라되어 강력한 시너지를 발휘했다.
건설은 2012년 1호기 착공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진행됐고, 마침내 2024년 9월 5일 4호기가 상업운전에 돌입하며 4개 호기가 모두 성공적으로 가동을 시작했다. 이는 한국의 시공 및 운영 능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면의 과제는 만만치 않았다. 당초 2017년으로 예정됐던 1호기 상업운전은 2021년에야 가능했으며, 건설 중 격납건물 균열 발견 및 보수, UAE 규제기관의 지적사항 등 기술적 난관에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총사업비는 초기 계약액의 1.5배가 넘는 최대 320억 달러까지 증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팀 코리아’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약 1조 5692억 원에 달하는 추가 공사비 정산을 두고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선 것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발주처와 한국전력으로 인한 공기 지연 및 비용 상승을 주장했고, 한국전력은 UAE로부터 비용을 먼저 회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자 한국수력원자력은 2025년 5월 7일 런던 국제중재재판소에 공식 중재를 신청하며 법적 다툼으로 비화됐다. 이 분쟁은 단순한 비용 문제를 넘어 한국 원자력계의 구조적 긴장과 거버넌스 부재를 드러낸 사건으로, 향후 국제 프로젝트 추진 시 대외 신뢰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 교두보 확보: 루마니아·체코의 낭보와 폴란드의 불확실성
바라카의 경험을 발판 삼아 K-원전은 까다로운 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루마니아에서는 연달아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키며 견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2023년 6월, 약 2600억 원 규모의 체르나보다 원전 삼중수소제거설비(TRF) 건설 계약을 따냈다. 이 시설은 캐나다, 한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건설되는 특수 설비로, 한국의 높은 기술 수준을 입증했다. 이어 2024년 12월에는 한국수력원자력 컨소시엄이 약 19억 유로 규모의 체르나보다 1호기 설비개선 사업 EPC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노후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는 사업으로, 건설뿐 아니라 운영·정비(O&M) 분야에서도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증명한 첫 사례다.
유럽 진출의 정점은 체코에서 찍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2024년 7월, 최대 4기의 APR1000 원자로를 짓는 두코바니 신규 원전 사업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된 데 이어, 2025년 6월 최종 계약을 체결하며 유럽 중심부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총사업비가 160억 유로(약 25조 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이 사업은, 입찰 과정에서 프랑스 EDF가 제기한 법적 문제와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적재산권 분쟁 등 험난한 과정을 모두 극복하고 얻어낸 성과여서 의미가 더욱 크다. 이는 서방 기업들이 지배해온 유럽 시장에서 한국이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 기술 공급자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반면, 폴란드에서는 급제동이 걸렸다. 2022년 10월, 국영 및 민간 기업과 퐁트누프 지역에 APR1400 원자로 2기를 짓기로 협력의향서(LOI)를 체결하며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2023년 12월 출범한 폴란드 신정부가 약 40조 원 규모의 해당 계약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한국 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프로젝트의 미래가 안갯속에 빠졌다. 폴란드 산업부 또한 "원자력 발전 수요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혀, 정권 교체와 에너지 정책 변화라는 정치적 변수가 장기 프로젝트에 미치는 위험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새로운 영토 개척: 아프리카 진출과 다각화 전략
K-원전의 영토는 아프리카 대륙으로도 확장됐다. 2022년 8월, 한국수력원자력은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사톰의 자회사가 짓는 이집트 엘다바 원전의 터빈섬 패키지 공사를 약 3조 원(22억 5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이는 주계약자가 아닌 하도급 형태로 참여한 것이지만, 특정 분야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신흥 시장에 진출하고 위험 부담을 줄이는 전략적 유연성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이후 두산에너빌리티가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1조 6000억 원 규모의 공사를 넘겨받아 2023년 8월부터 현장 공사를 진행 중이다.
이러한 대형 계약 외에도 한국 원자력 산업 생태계는 중국 친산 원전 기술 지원, 슬로베니아 및 루마니아에 대한 기자재 공급 등 다양한 형태로 국제 사회에 기여해왔다. 이는 K-원전의 저력이 단순히 대규모 시공 능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설계부터 부품 공급, 운영, 컨설팅에 이르는 깊고 넓은 산업 생태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래를 위한 제언: 지속 가능한 성공을 향하여
K-원전은 검증된 기술력과 통합된 사업 수행 능력, 비용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바라카 분쟁과 같은 내부 거버넌스 문제를 해결하고 , 폴란드 사례와 같은 정치적 위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정교한 전략이 필수적이다. 또한 대규모 EPC 사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설비 개선, 부품 공급, 그리고 차세대 먹거리인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 등 수출 모델을 다각화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경쟁력 있는 금융 지원을 동반한 체계적인 전략을 통해 K-원전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서 역할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K원전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전력 #바라카 #체코 #두코바니 #루마니아 #폴란드 #엘다바 #원전수출 #팀코리아 #SM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