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2025년 노벨 물리학상을 존 클라크, 미셸 H. 드보레, 존 M. 마티니스에게 "전기 회로에서 거시적인 양자 역학적 터널링과 에너지 양자화를 발견한 공로"로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노벨상 위원회 공식홈페이지 자료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가 7일(현지시간)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존 클라크(UC 버클리), 미셸 데보레(예일대 및 UC 샌타바버라), 존 마티니스(UC 샌타바버라 및 Qolab) 세 명의 과학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전기 회로에서 거시적 양자 역학적 터널링과 에너지 양자화의 발견"이라는 업적으로 상금 1,1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00만 달러)를 균등하게 나눠 받게 된다.
이번 수상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1984년과 1985년에 이루어진 실험이 거의 40년이 지난 후에야 노벨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한 발견이 과학사에 남긴 깊은 족적을 노벨 위원회가 신중하게 평가한 결과다. 당시에는 순수한 물리학적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이 연구가 오늘날 구글, IBM 같은 거대 기업들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는 양자 컴퓨터의 핵심 기술인 '초전도 큐비트'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양자 세계를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만들다
세 과학자의 가장 큰 업적은 원자나 소립자 같은 미시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양자역학의 법칙을 인간이 만든 전기 회로에서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셉슨 접합'이라는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 두 가지 놀라운 양자 현상을 증명했다.
첫 번째는 '양자 터널링'이다. 이는 충분한 에너지가 없는 입자가 마치 유령처럼 물리적 장벽을 통과하는 현상을 말한다. 연구팀은 두 개의 초전도체를 얇은 절연체 층으로 분리한 회로를 만들었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절연체 벽 때문에 전류가 흐를 수 없어야 하지만, 이들은 수십억 개의 입자로 이루어진 회로 시스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입자처럼 행동하며 장벽을 뚫고 자발적으로 상태가 바뀌는 것을 관측했다. 이는 '거시적 양자 터널링'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연 역사적 순간이었다.
두 번째는 '에너지 양자화'다. 이는 양자 시스템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가 계단처럼 특정 값들로만 끊어져 있다는 원리다. 연구팀은 자신들이 만든 초전도 회로에 마이크로파를 쏘아 회로가 특정 주파수의 에너지만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수십억 개의 전자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회로가 마치 하나의 '인공 원자'처럼 행동한다는 증거였다.
노벨 물리학 위원회 의장인 올레 에릭손은 "100년이 넘은 양자역학이 계속해서 새로운 놀라움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축하할 수 있어 기쁘다"며, "양자역학은 모든 디지털 기술의 근간이 되기에 엄청나게 유용하다"고 평가했다.
버클리 연구실에서 탄생한 완벽한 협력
이 역사적인 발견은 1980년대 중반 UC 버클리의 한 저온물리학 연구실에서 세 명의 과학자가 만들어낸 완벽한 협력의 산물이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존 클라크(1942년생)는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설계자'였다. 프랑스 파리-남 대학 출신의 미셸 데보레(1953년생)는 2003년 노벨상 수상자 앤서니 레겟의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추상적인 이론과 실험 사이의 다리를 놓는 '비전가'였다. 그리고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존 마티니스(1958년생)는 '물리학자들 사이의 공학자'로 불리며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치지 않고 정밀한 실험 장비를 만들고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수상 소식을 접한 존 클라크 교수는 "내 인생 최고의 놀라움이다. 완전히 기절할 지경"이라며 벅찬 감정을 표현했다.
양자 컴퓨터 시대를 연 초석
이들의 발견은 두 가지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첫째는 "양자 세계는 어디에서 끝나고 고전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라는 물리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한 것이다. 이들의 실험은 두 세계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없으며, 적절한 조건만 갖추면 거대한 시스템에서도 양자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는 '초전도 큐비트'의 탄생이다. 양자 컴퓨터의 기본 정보 단위인 큐비트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제어 가능한 2준위 양자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세 과학자가 만든 회로는 바로 그 자체였다. 사실상 그들은 초전도 큐비트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을 만든 셈이다.
특히 존 마티니스는 2014년 구글에 합류해 양자 컴퓨터 개발팀을 이끌었고, 2019년 기존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능가하는 '양자 우월성'을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 전문가는 이들의 연구가 "우리가 양자 세계를 제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시동을 걸었으며, 오늘날 초전도 큐비트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의 원리는 양자 컴퓨터뿐만 아니라 초정밀 양자 센서, 해킹이 불가능한 양자 암호 통신 시스템 등 차세대 양자 기술 개발의 근간이 되고 있다.
한국 과학계에 던지는 메시지
이번 노벨상은 양자 기술이 국가 안보와 경제 패권의 핵심 요소로 부상한 오늘날의 지정학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 등 주요국들은 양자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국가적 투자를 단행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1980년대의 순수한 기초 연구가 40년 후 세상을 바꿀 기술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기적인 성과나 응용 연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쓸모를 따지지 않는 호기심 기반의 기초 연구에 대한 장기적이고 꾸준한 투자가 결국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략적 기술 우위를 가져다준다는 교훈이다.
특히 이번 수상 연구가 거대한 국책 연구소가 아닌 대학 연구실에서 교수와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중요한 정책적 함의를 제공한다. 파괴적 혁신이 하향식 대형 프로젝트가 아닌, 젊은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지적 호기심을 추구할 수 있는 상향식 학술 환경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양자 기술 육성 전략이 진정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진 기술을 따라잡는 것을 넘어, 클라크, 데보레, 마티니스와 같은 차세대 선구자들이 나올 수 있는 연구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진정한 '양자 인프라'는 첨단 장비뿐만 아니라, 지적 자유가 보장된 환경에서 성장하는 창의적인 인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 시대의 시작
2025년 노벨 물리학상은 2022년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한 실험적 증명에 수여된 노벨상과 함께 '2차 양자 혁명'의 완성을 상징한다. 2022년 노벨상이 양자역학의 근본적인 '기묘함'을 확인했다면, 2025년 노벨상은 그 '기묘함'을 인간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40년 전 버클리의 한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작고 섬세한 회로가 남긴 유산은 양자 컴퓨터, 신약 개발, 신소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제 막 펼쳐지기 시작했다. 세 명의 수상자는 양자 세계와 고전 세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여는 법을 가르쳐준 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벨 위원회 의장의 말처럼 100년 된 이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심오한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이번 노벨상은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규칙 위에 세워질 새로운 기술 시대의 시작을 축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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