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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 산업 지형을 뒤흔들 대형 기업 결합이 가시화됐다. 네이버의 핀테크 자회사 네이버파이낸셜과 국내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Upbit)를 운영하는 두나무가 11월 포괄적 주식 교환을 통한 합병을 결정했다. 이로써 네이버는 검색, 커머스, 결제, 가상자산 사업을 동시에 영위하는 세계 최초의 글로벌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나게 됐다.

합병은 네이버파이낸셜이 두나무를 100% 자회사로 편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양사의 기업 가치는 두나무 약 15조 원, 네이버파이낸셜 약 5조 원으로 평가됐으며, 교환 비율은 약 1대 2.54(두나무 1주당 네이버파이낸셜 약 2.54주)로 산정됐다. 합병 법인의 전체 가치는 20조 원을 상회할 것으로 추산된다.

주목할 점은 가상자산 거래 수수료로 막대한 현금을 창출하는 두나무의 기업 가치가 국내 간편결제 1위 사업자인 네이버파이낸셜을 3배가량 웃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 핀테크 시장의 기형적 성장 구조를 보여주는 동시에, 네이버가 두나무의 자금력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명확히 드러낸다.

◆ 이해진 의장의 'AI 승부수'

이번 합병은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GIO·최고투자책임자)가 이사회 의장으로 복귀한 뒤 천명한 '소버린 AI(Sovereign AI·주권형 인공지능)' 전략의 핵심 퍼즐로 해석된다. 네이버는 자체 거대언어모델(LLM) '하이퍼클로바X(HyperClova X)'를 고도화하고 엔비디아(NVIDIA) GPU 기반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데 조 단위의 지속적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빅테크가 연간 수십조 원의 잉여현금흐름을 AI 인프라에 쏟아붓는 가운데, 네이버의 기존 현금 창출 능력만으로는 이러한 '머니 게임'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호황기에 연간 3조 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낼 수 있는 두나무는 네이버에게 가장 확실한 자금줄이 되는 셈이다.

◆ 지배구조 딜레마와 '의결권 위임'

합병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지배구조다. 주식 교환이 완료되면 송치형 두나무 의장을 포함한 두나무 기존 주주들이 합병 법인 지분의 약 30%를 확보해 최대 주주로 올라서는 반면, 네이버의 지분율은 기존 69%에서 약 17% 수준으로 급격히 희석된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지분율이 30% 미만으로 떨어지고 최대 주주 지위를 상실하면 합병 법인은 네이버 계열사에서 제외될 위험이 있다. 이는 네이버가 두나무의 현금 창출력을 재무제표에 연결해 AI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을 무산시킬 수 있다.

양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의결권 위임'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분석된다. 송치형 의장 등 두나무 주요 주주들이 보유한 의결권을 네이버 측에 위임함으로써, 네이버는 경제적 지분율 희석에도 불구하고 합병 법인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유지하고 계열사 지위를 방어하는 전략을 취했다.

◆ AI와 블록체인의 융합: '에이전트 N' 구상

이번 합병의 기술적 핵심은 네이버의 AI와 두나무의 블록체인 인프라 결합이다. 네이버 최수연 대표가 공개한 'AI 에이전트 N(Agent N)'은 사용자의 의도를 파악해 쇼핑, 예약, 금융 업무를 대신 수행하는 AI 비서다. 기존 AI 에이전트는 결제와 송금 단계에서 보안과 인증 문제로 사용자 최종 승인이 필요했으나, 두나무의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면 이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

AI 에이전트에게 고유한 디지털 지갑을 부여하고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특정 조건 하에서 자율적으로 자금을 집행할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하이퍼클로바X의 한국어 및 문맥 이해 능력과 업비트의 방대한 가상자산 거래 데이터가 결합하면 '초개인화된 AI 프라이빗 뱅커' 서비스 구현이 가능해진다.

두나무의 블록체인 기술 자회사 람다256(Lambda256)과 네이버 클라우드의 협력도 주목할 지점이다. 람다256의 블록체인 서비스 플랫폼 '루니버스(Luniverse)'를 네이버 클라우드에 탑재함으로써, 네이버는 한국 기업들이 블록체인 서비스를 개발할 때 사용하는 사실상의 표준 인프라를 장악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규제 충돌

합병의 가장 파괴적 시나리오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이다. 현재 네이버페이 같은 간편결제 사업자는 신용카드사 및 전자지급결제대행(PG)사에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하고 있다.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도입하면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네이버파이낸셜은 이미 해시드(Hashed) 등과 협력해 스테이블코인 지갑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3,300만 명의 네이버페이 사용자에게 암호화폐 지갑을 보급하는 효과를 낳으며, 테라-루나 사태 이후 위축된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네이버'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한 금융 당국은 민간 빅테크 기업의 화폐 발행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네이버의 스테이블코인이 은행 예금을 대체하면 통화 정책이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하고, 대출 등 자금 중개 기능 없이 지급 결제에만 사용되는 '내로우 뱅킹' 문제로 산업 자금 공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은행은 이에 대한 대항마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혹은 은행 예금 토큰을 선호하고 있다.

◆ 금산분리 논쟁과 정치적 리스크

이번 합병은 한국의 해묵은 규제 이슈인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논쟁을 재점화하고 있다. 네이버파이낸셜은 법적으로 '은행'이 아닌 '전자금융업자'로 분류되지만, 두나무와의 합병을 통해 수신, 여신, 외환, 투자 등 사실상 은행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거대 금융 플랫폼이 탄생하게 된다.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이것이 사실상의 금산분리 원칙 훼손이며, 규제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디지털 재벌'의 탄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두나무의 업비트가 이미 국내 시장 점유율 과반을 차지하는 독점적 사업자인 상황에서, 네이버와의 결합은 시장 지배력 전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가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 글로벌 경쟁 구도

네이버의 이번 행보는 전 세계적인 '슈퍼앱' 구축 경쟁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일론 머스크는 X(구 트위터)를 '모든 것의 앱'으로 만들겠다며 결제 및 가상자산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미국 내 송금 라이선스 취득 단계에 머물러 있다. 반면 네이버는 이미 완성된 결제 인프라와 세계 최고 수준의 거래소를 손에 넣어 즉각적인 실행력을 갖추게 됐다.

텔레그램은 9억 명의 사용자 기반으로 톤(TON) 블록체인과 지갑을 내장해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지만 규제의 회색지대에서 탈중앙화를 지향한다. 네이버는 한국이라는 OECD 국가의 엄격한 규제 테두리 안에서 '컴플라이언스가 완비된 슈퍼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메타(페이스북)는 과거 '리브라(디엠)' 프로젝트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려다 전 세계 규제 당국의 집중 포화를 맞고 좌초했다. 네이버는 '원화'라는 로컬 통화에 집중하고, '소버린 AI'라는 국가적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메타가 겪었던 '국가 통화 주권 침해' 논란을 피해 가려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 디지털 주권 방어와 미래 전망

미중 기술 패권 전쟁 속에서 네이버-두나무 연합은 한국이 독자적인 디지털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이해진 의장의 '소버린 AI'론은 데이터와 금융 주권을 미국이나 중국에 종속되지 않고 지켜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미국 빅테크의 대안'으로서 AI와 금융 인프라를 패키지로 수출하는 모델은 네이버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규제 당국이 조건부 승인을 내리고 네이버의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에 안착하는 낙관적 시나리오부터, 공정위의 강력한 독과점 방지 조치와 한국은행의 민간 스테이블코인 불허로 시너지가 제한되는 현실적 시나리오, 여론 악화와 정치권 개입으로 합병이 최종 불발되는 비관적 시나리오까지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거대한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규제 혁신'과 '독과점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난제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합병이 성사된다면 우리는 AI 비서가 자산을 관리하고 블록체인으로 결제하는 미래를 가장 먼저 일상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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