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당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의 김영남/위키백과 자료


북한의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4일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3일 향년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당과 국가의 강화발전사에 특출한 공적을 남긴 노세대 혁명가인 김영남 동지가 고귀한 생을 마쳤다"고 전했다. 공식 사인은 암성중독에 의한 다장기부전으로 발표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일 새벽 1시 박태성 내각 총리,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주요 간부들을 대동하고 평양 보통강구역 서장회관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북한 매체가 최고지도자의 동선을 '새벽 1시'로 특정해 보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장례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의 공동 결정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지며, 김 위원장이 직접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60년 공직생활, 3대 정권 핵심 외교직 역임

김영남은 1928년 항일애국자 집안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유학한 북한 1세대 외교 엘리트였다. 1952년 귀국 후 중앙당학교 교수를 거쳐 1956년경 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과장으로 외교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대 당 중앙위원회 위원(1970년), 정치국 후보위원(1974년), 정치국 위원(1978년)에 오르며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그는 1983년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현 외무상)에 임명돼 15년간 북한 외교 실무를 총괄했다.

1998년 9월 김정일 정권 출범과 함께 신설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올라 2019년 4월 은퇴할 때까지 21년간 재임하며 명목상 국가수반 역할을 수행했다. 1998년 개정된 북한 헌법은 상임위원장을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使臣)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하는" 역할로 규정했다.

대외 활동을 극도로 기피했던 김정일 위원장의 은둔형 통치 스타일에 맞춰, 김영남은 방북한 정상급 인사를 영접하고 각종 국제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며 사실상 정상외교를 도맡았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대표단장 방남

김영남의 대남 외교 경력에서 가장 주목받은 순간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었다. 당시 90세의 나이로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부부장과 함께 고위급 대표단 단장으로 방남해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면담했다. 개회식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할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 시 공식 환영식과 면담을 주재하며 명목상 국가수반 자격으로 남북관계의 역사적 순간마다 북한의 공식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국제 외교에서는 1999년 6월 공식 방중을 통해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냉각기에 빠졌던 북중 관계를 공식적으로 복원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2018년 6월에는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처세의 달인' 3대 권력 교체 속 숙청 없이 생존

김영남의 60년 공직 생활에서 가장 독보적인 점은 3대에 걸친 권력 교체의 격동기 속에서 좌천이나 혁명화(사상 재교육을 위한 지방 좌천)를 단 한 차례도 겪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002년 그를 만났을 때 "북한이 내세웠던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 조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한 고위층 탈북민은 그의 비결을 "교과서에 나온 대로만 말하는 고지식함"으로 꼽았다.

외신은 그를 "깊고 우렁찬 목소리로 선전적인 연설을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실권을 추구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최고지도자의 의도를 정확히 집행하는 완벽한 관료로서, 김씨 일가에 어떠한 정치적 위협도 되지 않는 안전한 인물로 간주됐던 것으로 분석된다.

장의위원회 명단에서 대남 라인 배제 눈길

이번 국가장의위원회 100명 명단에는 김정은 위원장을 필두로 최룡해 상임위원장, 박태성 내각 총리, 조용원·박정천·김덕훈 당 비서, 최선희 외무상, 노광철 국방상 등 현 권력 핵심 인물들이 포함됐다.

그러나 과거 대남 및 외교 업무의 핵심이었던 김영철 전 통일전선부장과 리선권 전 조국평화통일위원장(전 외무상)이 명단에서 완전히 누락됐다. 이들은 불과 1년 전인 2024년 5월 김기남 전 비서 사망 당시 장의위원회에는 포함됐었다.

선전 원로의 장례에는 포함됐던 대남 라인 핵심들이 외교 원로의 장례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으로, 북한이 2023년 말 통일 개념을 헌법에서 삭제하고 남북 관계를 두 개의 교전국 관계로 재정의한 이후 대남 사업 분야의 정치적 위상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시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정부, 조의문 발표

한국 통일부는 4일 정동영 장관 명의의 조의문을 발표했다. 정 장관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북측 대표단을 이끌고 방남해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한 바 있다"고 평가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과거 북한 고위 인사 사망 시 사용되던 남북 간 전화통지문 방식이 아닌 통일부 대변인이 조의문을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재 남북 간 모든 통신선이 단절된 경색된 남북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영남의 사망은 2024년 5월 사망한 김기남 전 비서와 더불어 김일성 시대를 상징하는 사실상 마지막 혁명 원로 세대의 완전한 퇴장을 의미한다.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 세대와의 물리적·상징적 연결고리가 소멸하면서, 김 위원장이 과거의 유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대를 본격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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