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회견 중인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미 국무장관/보도영상 캡춰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연합(EU)의 디지털 규제를 주도한 전직 고위관료와 시민단체 인사 5명에 대해 입국 금지 조치를 단행하면서, 대서양 동맹국 간 디지털 거버넌스를 둘러싼 갈등이 외교 마찰로 격화되고 있다. 이번 조치는 동맹국 관료를 대상으로 한 전례 없는 강경 대응으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가치 충돌이 물리적 제재로 확대된 첫 사례다.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미 국무장관은 23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미국인의 관점을 검열하고 수익 창출을 제한하며 억압하기 위해 미국 플랫폼을 강압하는 조직적 노력을 주도한 급진적 활동가들과 무기화된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국무부는 이들의 행위가 "미국의 외교 정책에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제재 대상에는 EU 디지털서비스법(DSA) 입안을 주도한 티에리 브르통(Thierry Breton) 전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위원을 비롯해, 디지털헤이트대응센터(CCDH)의 임란 아메드(Imran Ahmed) 최고경영자, 글로벌허위정보인덱스(GDI)의 클레어 멜포드(Clare Melford) 공동설립자, 독일 헤이트에이드(HateAid)의 안나-레나 폰 호덴베르크(Anna-Lena von Hodenberg) 상임이사와 조세핀 발롱(Josephine Ballon) 법무팀장이 포함됐다.
특히 브르통 전 위원장은 지난해 8월 일론 머스크가 도널드 트럼프 당시 후보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공개 서한을 보내 "유해 콘텐츠 확산 방지"를 경고하면서 미국 측의 강한 반발을 샀다. 미 하원 사법위원회는 이를 "외국 관료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해 후보자의 발언 기회를 검열하려는 시도"로 규정한 바 있다.
유럽의 반발은 즉각적이고 격렬했다.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조치는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훼손하려는 협박이자 강압"이라고 비난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디지털 공간을 지배하는 규칙이 타인에 의해 강요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며 EU 차원의 대응을 시사했다.
스테판 세주르네(Stephane Sejourne) EU 집행위원 부위원장도 "어떤 제재도 유럽 인민의 주권을 침묵시킬 수 없다"며 브르통 전 위원장과의 "완전한 연대"를 선언했다. EU 집행위원회는 같은 달 X(구 트위터)에 대해 DSA 위반을 이유로 1억2천만 유로(약 1,80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규제 강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수정헌법 제1조에 기반한 미국의 '표현의 자유 절대주의'와 인간의 존엄성과 방어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유럽의 디지털 규제 철학이 정면 충돌한 결과다. 미국은 EU의 규제를 자국 기업에 대한 '검열'이자 '비관세 장벽'으로 간주하는 반면, 유럽은 거대 테크 기업의 알고리즘 권력을 통제하는 주권 행사로 보고 있다.
미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의 연구에 따르면, EU의 디지털 규제로 인해 미국 기업들이 부담하는 비용과 수익 손실은 연간 최대 976억 달러(약 130조 원)에 달한다. 2024년 미국의 대EU 상품 무역 적자는 2,359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의 디지털 규제를 불공정 무역 관행으로 지정해 보복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통상법 301조 조사를 검토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 중인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은 EU의 디지털시장법(DMA)과 유사한 구조로, 미국은 이미 한국의 디지털 정책에 대한 이견을 이유로 12월 정례 통상 회의를 전격 취소한 바 있다. 미 국무부는 한국 투자자들에 대한 비자 지원 업무도 중단했다.
브르통에 대한 비자 금지는 한국의 규제 당국자와 입법자들에게도 미국 빅테크를 압박하는 규제를 입법할 경우 유사한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 한국 플랫폼 기업들은 국내 규제와 미중 기술 전쟁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다.
이번 사태는 인터넷이라는 국경 없는 공간에서 충돌하는 두 개의 민주주의 모델을 드러낸다. 유럽은 "혐오와 허위정보가 넘치는 공론장은 민주주의를 질식시킨다"는 존엄 보호의 논리로, 미국은 "누가 혐오와 허위정보를 정의하는가"라는 자유 보호의 논리로 맞서고 있다. 그러나 동맹국 시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확장하겠다는 미국의 방식은, 대화와 설득이 아닌 힘을 통한 가치관 강요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적 해법과는 거리가 멀다.
디지털 공간을 둘러싼 서방 세계의 자유주의적 질서가 균열하면서, 한국은 더 이상 양쪽의 장점만을 취하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표현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 디지털 주권과 경제 협력 사이에서 한국형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외교적 과제가 급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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