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두코바니 원전 단지의 전경/체코전력공사 자료


올해 5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전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노선에서 벗어나 '실용주의적 에너지 믹스'를 표방하며 원전 정책 기조를 전환했지만, 해외 수출 시장에서는 오히려 퇴각하는 모순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기존 원전의 계속 운전을 허용하면서도, 체코 원전 수주를 둘러싼 불평등한 계약 구조와 유럽 시장 철수로 원자력 산업의 근본적 경쟁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11월 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AI 시대에는 하루가 늦으면 한 세대가 뒤처진다"며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한 안정적 전력 공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고리 2호기를 포함한 노후 원전의 수명 연장을 결정했고, 건설 중이던 신한울 3·4호기의 공사도 재개했다. 이는 부산·울산·경남 지역 70만 가구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하는 실질적 조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신규 대형 원전 건설에 대해서는 '현실적 불가능론'을 고수하고 있다. 9월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이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했다. 원자력 발전소는 부지 선정부터 가동까지 최소 15년 이상 소요되는 반면, AI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전력 수요는 1~2년 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라는 논리다.

정책 기조의 변화는 예산 편성에서도 확인된다. 2024년 더불어민주당이 원전 생태계 복원 예산을 전액 삭감했던 것과 달리, 11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통과한 2026년도 예산안은 정부 원안이 대부분 수용됐다. 특히 차세대 원전 기술인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관련 예산 329억 2천만 원이 그대로 확정됐고, 소형모듈원전(SMR) 제작지원센터 구축 예산은 오히려 1억 원 증액됐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지난해 7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프랑스 전력공사(EDF)를 제치고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건설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으나, 올해 6월 본계약 체결 과정에서 수익성과 기술 주권 측면의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계약 체결 자체도 순탄치 않았다. 5월 6일 체코 법원은 본계약 서명식을 하루 앞두고 한수원과 체코전력공사(CEZ) 간 계약 체결을 보류하라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법원은 "계약이 체결되면 탈락한 입찰자가 향후 승소하더라도 구제받을 기회가 원천 차단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약 한 달 뒤인 6월 4일 체코 최고행정법원이 "공공 인프라 구축이라는 중대한 공익이 탈락 업체의 절차적 이익보다 우선한다"며 하급심 결정을 취소하면서 극적으로 계약이 성사됐다.

문제는 수익성이다. 24조 원에서 최대 26조 원으로 추산되는 총사업비 중 상당 부분이 미국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와 체코 현지 기업으로 유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8월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자료에 따르면, 한수원은 원전 1기당 기술사용료 1억 7천500만 달러(약 2천400억 원)와 웨스팅하우스 기자재 구매 6억 5천만 달러(약 9천억 원)를 지급해야 한다. 두코바니 5·6호기 기준으로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해야 하는 총액은 약 3조 3천억 원에 달한다.

더 심각한 것은 핵연료 공급권 상실이다. 한수원은 214억 원의 연구개발 예산을 투입해 고유 원전 연료 'HIPER16'을 개발하고 48건의 특허를 확보했지만, 체코 원전의 핵연료 공급권을 웨스팅하우스에 100% 양보했다. 체코 원전 건설 법인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초기 10년치 핵연료 공급 계약액만 150억 코루나(약 9천600억 원)에 달한다. 10월 15일에는 기술사용료 명목으로 3억 5천만 달러(약 5천억 원)를 웨스팅하우스에 선지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1월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 체결된 '글로벌 합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합의의 유효 기간은 50년이며, 웨스팅하우스가 계약 종료를 원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5년씩 연장되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이 독자 개발한 SMR을 수출할 때조차 웨스팅하우스 또는 미국 제3의 기관으로부터 '기술 자립 여부'를 검증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점이다.

웨스팅하우스와의 합의가 초래한 가장 즉각적인 피해는 폴란드 원전 사업 무산이다. 8월 19일 황주호 전 한수원 사장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폴란드 원전 사업 철수를 공식 확인했다. 황 사장은 "폴란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영기업 중심의 사업을 원치 않아 철수했다"고 밝혔으나, 업계에서는 웨스팅하우스와의 '시장 분할' 합의가 실질적 이유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폴란드뿐 아니라 한수원은 스웨덴, 네덜란드, 슬로베니아 등 유럽 각국에서 진행 중이던 원전 수주 활동을 잇달아 중단하거나 철수했다. 현재 유럽 대륙에서 한국이 진행 중인 사업은 체코 두코바니 프로젝트만 남은 상태다. 박상덕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 수석연구위원은 "에너지 정책은 최소 100년을 내다봐야 한다"며 정부의 근시안적 시각을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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