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이 40여 년 만에 최악의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관세 정책과 전 세계적인 소비 위축,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과잉 생산이 맞물리면서 '액체 금'으로 불리던 스카치 위스키가 창고에 쌓이고 있다. 업계는 1980년대 33개 증류소가 문을 닫았던 '위스키 호수(Whisky Loch)' 사태의 재현을 우려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글로벌 스카치 위스키 판매량은 3% 감소하며 3년 연속 하락세를 기록했다. 특히 최대 수출 시장인 미국에서 1월부터 9월까지 판매량이 전년 대비 6% 급감했다. 세계 1위 주류 기업 디아지오(Diageo)는 올해 회계연도 영업이익이 27.8% 급감하는 충격을 받았으며, 순이익도 39.1% 감소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4월 2일 '해방의 날'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 기본 관세를 부과하면서 스카치 위스키 업계는 매주 400만 파운드(약 70억 원)의 손실을 입고 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협회(SWA)는 이 관세로 인해 월간 2,000만 파운드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복잡한 3단계 유통 구조를 거치면서 최종 소비자 가격은 15~20% 이상 상승했고, 이는 수요 급감으로 이어졌다.
공급 과잉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팬데믹 기간 동안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보복 소비'로 폭발하자, 주류 기업들은 이를 장기 트렌드로 오판하고 공격적인 증산을 단행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고금리로 가처분 소득이 감소하면서 소비 패턴이 '프리미엄'에서 '가성비'로 급격히 이동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음주율은 54%로 떨어져 9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위기의 심각성은 디아지오의 생산 중단 조치에서 드러난다. 디아지오는 스코틀랜드 북동부 로즈아일(Roseisle) 몰팅 공장 가동을 내년 6월까지 중단하고, 하이랜드의 티니닉(Teaninich) 증류소 운영도 일시 중지했다. 다수의 몰트 증류소들이 주 7일 24시간 풀가동 체제에서 주 5일 근무제로 전환하며 생산량을 대폭 줄이고 있다. 스카이 섬의 명품 브랜드 탈리스커(Talisker) 증류소 재개발 계획도 보류됐다.
미국산 버번 위스키 업계도 유사한 위기에 직면했다. 짐 빔(Jim Beam)은 내년 한 해 동안 켄터키 클레르몽(Clermont) 주 증류소 가동을 완전히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켄터키 창고에는 1,610만 배럴의 버번이 쌓여 있으며, 공급 과잉에 직면한 미국 버번 업체들이 가격 할인에 나서면서 스카치 위스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한국 시장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던 한국 위스키 시장은 올해 들어 급격히 냉각됐다.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산 와인 수입량이 약 18% 급감했으며, 위스키 수입액도 정체 또는 감소 국면에 진입했다. 대신 저렴한 위스키를 탄산수에 섞어 마시는 '하이볼(Highball)'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가 싱글 몰트 시장이 잠식당하고 있다.
5월 영국과 미국이 체결한 무역 합의에서 스카치 위스키는 제외됐다. 영국 정부는 미국산 바이오에탄올 시장 개방을 대가로 자동차와 철강 산업을 방어했으나, 스코틀랜드의 핵심 수출품인 위스키와 연어는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됐다. 영국 맥주 및 펍 협회(BBPA)는 "바이오에탄올은 맥주 제조에 쓰이지 않는데 이를 맥주 산업의 승리인 양 포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비판했다.
케이트 포브스(Kate Forbes) 스코틀랜드 부총리는 "미국의 관세가 스코틀랜드 농촌 경제에 불균형적으로 큰 타격을 주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위스키 산업은 스코틀랜드 전체 부가가치의 3%를 차지하며 약 71억 파운드(약 12조 원)의 경제적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증류소들이 밀집한 하이랜드와 아일라(Islay) 섬 등 농촌 지역에서는 핵심 고용원이다.
업계는 향후 2~3년간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재정난을 견디지 못한 중소형 독립 증류소들이 대기업이나 해외 자본에 인수되는 통폐합 바람이 예상된다. 2024년 생산 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던 인치데어니(InchDairnie) 증류소는 10월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한편 판매되지 않은 위스키가 창고에 쌓이면서 예상치 못한 환경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위스키 숙성 과정에서 증발하는 알코올을 먹고 자라는 검은 곰팡이가 증류소 인근 마을의 건물과 나무를 뒤덮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지역 사회와의 갈등과 추가적인 환경 정화 비용 부담이 우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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