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의 일본 시장 진출이 사상 최대 규모로 확대되면서 한일 경제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반세기간 일본 자본과 기술이 한국으로 흘러들던 일방통행 구조가 무너지고, 한국 기업들이 일본 내수 시장 깊숙이 파고드는 쌍방향 협력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2025년 1~9월 한국의 대일 직접투자 실행액은 13억2천7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2024년 연간 실적 6억3천800만 달러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수치다. 같은 기간 신규 법인 설립 건수도 318개로 역대 최다치를 경신했다.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은 2일 이같은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하며 한국 기업의 일본 진출 러시를 조명했다.
이번 투자 확대의 배경에는 엔저 현상 장기화와 일본 시장의 디지털 전환 수요 급증, 미중 갈등에 따른 공급망 재편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 특히 중국 기업들이 일본 내 입지가 좁아지면서 한국 기업들이 그 빈자리를 빠르게 채우는 '반사이익' 구조가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 식품 기업들, '현지 생산' 체제로 전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식품 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9월 지바현(千葉縣) 기미쓰시(木更津市)에 약 1천억 원을 투입해 대규모 만두 생산 공장을 완공했다. 부지 면적 4만2천 제곱미터, 연면적 8천200제곱미터 규모로 CJ가 일본 내 직접 공장을 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존에는 2020년 인수한 교자케이카쿠(餃子計劃)의 4개 공장을 활용했지만, 이번에는 독자 브랜드 비비고(Bibigo)를 위한 전초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CJ제일제당은 일본 굴지의 종합상사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와도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일본 최대 식품 도매상 니혼액세스(日本アクセス)와 편의점 체인 패밀리마트(FamilyMart)를 보유한 이토추의 유통망을 통해 일본 전역으로 제품을 공급한다는 전략이다. 연간 1조1천억 원 규모로 추산되는 일본 교자 시장에서 CJ의 제품력과 이토추의 유통력이 결합된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
농심(農心)은 지난해 6월 도쿄 하라주쿠(原宿)에 신라면 분식(Shin Ramyun Bunsik) 체험 매장을 열었다. 일본 젊은 층이 집결하는 트렌드 발신지에 매장을 낸 것은 신라면을 힙한 문화 아이콘으로 포지셔닝하려는 브랜딩 전략이다. 소비자가 직접 원하는 토핑을 골라 라면을 끓여 먹는 한강 라면 스타일의 경험을 제공하며 강력한 바이럴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 무신사, 도쿄서 8만 명 몰려…플래그십 스토어 추진
패션과 뷰티 산업에서는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는 전략이 주효했다. 한국 1위 패션 플랫폼 무신사(MUSINSA)는 지난해 10월 도쿄 시부야(渋谷)에서 개최한 팝업 스토어에서 24일간 8만2천 명의 방문객을 끌어모았다. 평일 평균 3천 명, 주말 4천 명이 방문했으며 특정일에는 5천 명을 넘기기도 했다.
팝업 기간 중 참여 브랜드의 거래액은 전월 대비 3.5배 급증했다. 일부 브랜드는 4배 이상 증가했다. 방문객들은 현장에서 옷을 입어보고 QR코드를 스캔해 무신사 글로벌 앱에서 주문하는 방식으로 재고 부담 없는 쇼핑을 즐겼다. 무신사는 이번 성공을 발판으로 올해 도쿄 시부야 또는 하라주쿠에 정식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추진 중이다.
한국 화장품 브랜드들도 비건과 친환경을 내세우며 일본의 클린 뷰티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민텔(Mintel)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소비자의 66%가 친환경 인증 제품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조선미녀(Beauty of Joseon), 토리든(Torriden) 등 한국 브랜드들은 동물성 원료를 배제한 비건 포뮬러와 재활용 가능한 패키징으로 일본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 AI·반도체 기업들도 일본 공략 나서
소비재를 넘어 기술 기업들의 진출도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의 AI 반도체 유니콘 기업 리벨리온(Rebellions)은 지난해 3월 일본 법인을 설립하고 데이터센터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미국 빅테크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AI 인프라, 즉 소버린 AI(Sovereign AI) 구축에 사활을 걸면서 효율적인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벨리온은 일본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며 현지 네트워크를 확보했고, 일본 통신사 및 클라우드 사업자와 개념검증을 진행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연평균 40% 이상 고성장이 예상되는 일본 생성형 AI 시장에서 엔비디아(NVIDIA)가 독점하고 있는 틈새를 파고들겠다는 전략이다.
카카오헬스케어는 지난해 3월 일본 법인을 설립하고 혈당 관리 서비스 파스타와 체중 관리 서비스 피노어트를 출시했다. 세계 최고의 고령화 국가인 일본의 만성질환 관리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한국 SaaS 기업들도 지난해 도쿄에서 열린 글로벌 SaaS 마켓플레이스 행사에서 일본 대기업 및 SI 업체들과 다수의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수요에 부응하고 있다.
◆ "정경분리 원칙, 기업 차원서 철저히 실현"
이번 한국 기업의 일본 진출 러시는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경제 교류가 오히려 가속화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2024년 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시도와 탄핵 정국으로 한국은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일본도 지난해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 집권 이후 우경화 기조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리스크가 경제 교류를 차단하기는커녕 오히려 촉매제로 작용했다.
일본의 중국 견제 기조가 강화되면서 중국 자본과 기업의 입지가 좁아졌고, 그 빈자리를 한국 기업들이 빠르게 대체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엔저 현상도 한국 기업들의 일본 내 사무실 임대, 법인 설립, 인력 채용 등 초기 진입 비용을 낮춰주며 투자를 부추겼다. 정경분리 원칙이 기업 차원에서 철저하게 실현되고 있다는 평가다.
일본 정부도 해외 유망 스타트업 유치에 적극적이다. 2027년까지 스타트업 투자 규모를 10조 엔으로 늘리고 유니콘 기업 100개를 육성하겠다는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이다. 도쿄도청과 일본무역진흥기구는 스타트업 비자 요건 완화, 사무실 임대료 지원, 법인 설립 원스톱 서비스 제공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중소벤처기업부도 도쿄에 K-스타트업 센터를 개소해 한국 스타트업의 현지 안착을 돕고 있다.
◆ 인력 부족·신뢰 구축…넘어야 할 산 여전
다만 한국 기업들이 넘어야 할 산도 높다. 일본 시장 진출의 가장 큰 장벽은 일본 내 인력 부족이다. 한국 스타트업 대표들은 일본 현지 채용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일본의 유효구인배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며, 우수 인재들은 안정적인 일본 대기업이나 글로벌 빅테크를 선호한다. 인지도가 낮은 한국 B2B 스타트업이 현지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서는 높은 임금과 복지, 명확한 비전 제시가 필수적이다.
신뢰 구축도 큰 과제다. 일본 비즈니스 문화의 핵심은 신뢰와 장기적 관계다.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일본 내 레퍼런스가 없으면 계약 성사가 어렵다. 의사결정 속도가 느리고 꼼꼼한 검증 과정을 거치는 일본 기업의 특성상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한국 기업은 좌절하기 쉽다. 무신사나 리벨리온이 현지 파트너를 적극 활용하는 이유도 이러한 신뢰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역사 문제도 언제든 다시 폭발할 수 있는 뇌관이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논란 등은 한일 관계의 불씨로 남아 있다. 정치적 갈등이 재점화될 경우 소비자 불매운동이나 정부 조달 배제 등 유무형의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업들은 이러한 리스크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현지 사회공헌 활동 등을 통해 호감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한국 기업들의 일본 진출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일본의 거대한 내수 시장과 선진화된 소비 인프라, 디지털 전환 수요는 한국 기업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기회다. 과거 일본 기업들이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한국에 진출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한국 기업들이 일본의 시장 기회를 찾아 나서는 구조적 대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한일 경제 관계가 수직적 분업에서 수평적 협력을 넘어 상호 투자가 활발한 쌍방향 구조로 진화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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