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보도영상 캡춰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북부를 강타한 대홍수와 산사태로 744명이 숨지고 551명이 실종됐다. 11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은 이번 재난은 135년 만에 형성된 열대성 사이클론과 무분별한 산림 파괴가 결합된 '복합 재난'으로, 인도네시아 현대사 최악의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됐다.

기상 이변과 생태계 붕괴의 치명적 조합

말라카 해협에서 형성된 열대성 사이클론 '세냐르(Senyar)'는 1886년 이후 이 지역에서 관측된 첫 사이클론이다. 인도 기상청(IMD)과 인도네시아 기상기후지질청(BMKG)은 음의 인도양 쌍극자와 라니냐 현상이 결합해 동인도양 해수면 온도를 비정상적으로 상승시켰다고 분석했다. 세냐르는 북수마트라와 아체 지역에 일일 300~400mm의 기록적 폭우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기상 이변만으로는 이번 참사를 설명할 수 없다. 환경부 장관 하니프 파이솔 누로픽(Hanif Faisol Nurofiq)은 피해가 집중된 바탕 토루(Batang Toru) 유역의 산림 보전 능력이 무분별한 토지 이용 변경으로 자연 상태의 38% 수준으로 급감했다고 밝혔다. 숲이 사라진 지표면은 빗물을 흡수하지 못하고 고점도의 토석류를 형성했으며, 상류에서 벌채된 거대한 원목들이 하류의 교량과 가옥을 파괴하는 '공성퇴' 역할을 했다.

"빗방울은 나무를 쓰러뜨리지 않는다"

타파눌리 지역의 생존자 렐리와티 시레가르(Relliwati Siregar·62)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비가 홍수를 일으킨 것은 맞지만, 빗물만으로 이렇게 많은 나무들이 쓸려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빗방울은 나무를 쓰러뜨리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손(Mischievous hands)'이 나무를 베어냈고, 그들은 숲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분노를 표출했다.

홍수 직후 해변과 마을을 뒤덮은 수만 톤의 원목 잔해는 불법 벌채의 명백한 증거가 됐다. 환경 단체 왈리(WALHI)와 자탐(JATAM)은 중국 국영기업이 주도하는 510메가와트(MW) 규모의 바탕 토루 수력발전소 건설과 PT 아긴코트 리소시스(PT Agincourt Resources)가 운영하는 마르타베(Martabe) 금광을 비롯한 7개 기업을 재난의 배후로 지목했다.

중국 자본 댐 프로젝트 논란 재점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과 연계된 바탕 토루 수력발전 프로젝트는 이번 재난으로 환경 파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댐 건설 부지는 세계에서 가장 멸종 위기에 처한 유인원인 타파눌리 오랑우탄의 유일한 서식지다. WALHI는 2018년 댐 건설로 인한 산사태와 홍수 위험을 경고하며 환경 허가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한 바 있다. 환경 단체들은 댐 건설을 위한 도로 개설과 부지 조성이 토양의 응집력을 약화시켜 이번 홍수 피해를 가중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환경산림부는 최근 불법 벌채가 '목재 세탁'이라는 지능적 형태로 진화했다고 밝혔다. 국유림이나 보호구역에서 불법으로 벌채한 나무를 마치 사유지나 허가된 지역에서 벌채한 것처럼 서류를 위조해 유통하는 방식이다. 검찰총장실과 산림부는 합동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홍수 피해 지역에서 발견된 목재의 DNA와 출처를 역추적하고 있다.

프라보워 정부, 군 중심 대응···국가 비상사태는 선포 안 해

취임 초기 대형 재난을 맞이한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대통령은 막대한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았다. 이는 유사한 피해를 입은 스리랑카가 즉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제 원조를 요청한 것과 대조된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군함 3척과 병원선 2척, 수송기 등을 동원해 고립된 지역에 물자를 공급하는 등 군 중심의 대응 체계를 가동했다.

구호 물자 도착이 지연되면서 시볼가(Sibolga) 등지에서 주민들이 식량 창고와 상점을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이풀라 유수프(Saifullah Yusuf) 사회부 장관은 이를 "약탈이 아닌 강제 분배 혹은 의도된 분배"라고 명명하며 사회적 혼란상을 축소하려 시도했다.

EU 산림규제 압박 강화 예고

이번 재난은 인도네시아의 대EU 무역 협상에 불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EU는 12월 30일부터 대기업을 대상으로 산림전용방지규정(EUDR)을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이 규정은 팜유, 목재, 고무, 커피 등 주요 상품이 산림 파괴와 무관함을 위성 좌표 등으로 입증해야만 EU 시장 진입을 허용한다.

인도네시아는 그동안 자국의 목재 합법성 인증(SVLK)이나 지속가능 팜유 인증(ISPO)과 같은 국가 인증 시스템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며 EUDR이 차별적 무역 장벽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이번 홍수를 통해 드러난 목재 세탁의 실태와 불법 벌채가 초래한 참혹한 결과는 인도네시아의 산림 관리 시스템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훼손시켰다. 유럽의 환경 단체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이번 재난을 근거로 EUDR의 엄격한 적용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말라카 해협이 더 이상 기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글로벌 공급망 안보에도 심각한 우려를 제기한다.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핵심 통로인 이 지역에서 사이클론과 같은 기상 이변이 빈번해질 경우, 해운 운임 상승과 물류 지연 등 경제적 비용이 급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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