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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교차관 회담을 둘러싸고 양국의 발표 내용이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동맹 내부의 우선순위 불일치가 드러났다. 박윤주 외교부 제1차관과 크리스토퍼 랜다우(Christopher Landau) 국무부 부장관 간 회담은 10월 한미 정상회담과 11월 14일 공동 설명자료(Joint Fact Sheet)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양측이 내놓은 보도자료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국 외교부는 이날 회담 결과 "원자력, 조선, 원자력(핵)추진잠수함 등 주요 분야의 후속 조치를 신속하고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분야별 실무협의체를 조속히 가동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특히 박 차관이 "한국의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한미 간 협의 절차의 조속한 개시"를 요청했다고 명시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핵추진잠수함과 원자력 기술 자율성 확보라는 핵심 안보 주권 의제를 실무 단계로 구체화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가 토미 피고트(Tommy Pigott) 부대변인 명의로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핵추진잠수함(Nuclear-powered submarine)'이나 '원자력(Nuclear energy)'이라는 단어 자체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미국 측은 "한미 동맹의 현대화"를 언급하며 "한국의 미국 제조업, 특히 조선업(shipbuilding)에 대한 전례 없는 투자 약속"을 환영한다는 내용을 최우선으로 부각시켰다. 비자(Visa) 및 비즈니스 여행 관련 워킹그룹의 성과도 함께 거론했다.

이러한 서사의 괴리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거래적(Transactional) 동맹관과 미국 전통의 비확산(Non-proliferation) 기조가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3,500억 달러(약 515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을 지렛대로 핵 기술 협력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미 국무부는 비확산 관료 집단의 신중론과 법적·기술적 검토 미완료를 이유로 공식 문서화를 꺼리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둘러싼 한미 간 입장차도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국은 핵잠수함을 바로 이곳, 위대한 필라델피아 조선소(Philadelphia Shipyard)에서 건조할 것"이라고 못 박았지만,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우리는 30년 넘게 기술을 축적해왔으므로 국내 건조가 합리적"이라며 필라델피아 조선소의 시설 미비를 지적한 바 있다.

핵연료 문제도 쟁점이다. 미 해군은 무기급에 가까운 93%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사용하지만, 한국은 상용 원전 기술과 호환되는 20% 미만의 저농축 우라늄(LEU) 방식을 선호해왔다. 미국이 HEU 원자로를 공급하면 한국의 독자 농축 권한 요구는 명분을 잃게 되고, 한국이 LEU 자체 농축을 고집하면 미국은 한미 원자력협정(123 협정) 개정이라는 부담을 져야 한다.

미 국무부의 침묵은 이러한 기술적·법적 난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협의를 공식화할 경우의 정치적 파장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123 협정 개정은 미 의회의 90일 검토를 거쳐야 하며, 짐 리시(Jim Risch) 등 상원 외교위원회 주요 인사들은 전통적으로 비확산 원칙을 고수해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치적으로 승인하더라도 의회가 비준 과정에서 제동을 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국의 견제도 미국의 신중론을 강화하는 요인이다. 다이빙(Dai Bing) 주한 중국대사는 11월 13일 기자회견에서 "한미 간 핵추진잠수함 협력은 비확산 체제와 지역 안정에 직결된 문제"라며 "한국이 신중하게 처신하기를 바란다"고 경고했다. 미 해군 참모총장 대릴 코들(Daryl Caudle) 제독이 한국의 핵잠수함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 사용될 것(counter China)"이라고 발언한 것도 중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한편 한국의 투자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한화오션은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1억 달러에 인수하고 50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발표했으며, 미 해군 보급선 '월리 시라(Wally Schirra)' 함의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수주해 거제 조선소에서 작업을 완료했다. 미국이 확보한 '투자' 성과는 챙기면서도 부담스러운 '핵 협력' 이행은 속도를 조절하는 관료적 전략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미국 행정부뿐만 아니라 의회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인 공공외교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국내 건조만을 고집하기보다 한화의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활용한 공동 건조 등 유연한 접근을 통해 미국의 정치적 명분을 세워주면서 실리를 취하는 전략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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