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공산당 전당대회 모습(9년 전)/보도영상 캡춰
쿠바 공산당(PCC)이 2026년 4월로 예정됐던 제9차 전당대회를 전격 연기했다. 1959년 혁명 이후 최고 의결기구로 5년마다 개최돼온 당 대회의 연기는 현 체제가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봉착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간) 개최된 제11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뤄진 이번 결정은 현직 미겔 디아스카넬(Miguel Díaz-Canel) 제1서기가 아닌, 은퇴한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서한을 통해 제안됐다. 라울 카스트로는 서한에서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당 대회를 연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면서도, 현재 쿠바의 현실을 고려할 때 대회를 "추후(posterior date)"로 미루는 것이 "바람직하다(advisable)"고 권고했다.
그는 국가가 보유한 모든 자원과 당 간부들의 에너지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하며, 2026년을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회복하는 해"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이 제안을 낭독하며 "퇴보가 아니라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전력망 붕괴로 국가 마비..."암흑의 2년"
전당대회 연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에너지 위기다. 2024년과 2025년 쿠바는 전력망 완전 붕괴를 여섯 차례 이상 겪었다. 2024년 10월 18일부터 24일까지는 주력 발전소인 안토니오 기테라스(Antonio Guiteras) 발전소의 불시 정지로 국가전력시스템(SEN)이 완전히 붕괴해 학교와 직장이 5일간 폐쇄됐다. 같은 해 11월 6일에는 허리케인 라파엘(Rafael) 강타로, 12월 4일에는 기테라스 발전소 재고장으로 2개월 내 세 차례 전국적 블랙아웃이 발생했다.
올해 9월 10일부터는 동부 지역 전력망이 분리돼 라스투나스 등 5개 주의 전력 공급이 완전 중단됐다. 12월 3일에는 하바나를 포함한 서부 지역이 암흑에 잠겼다. 2025년 기준 일일 전력 생산 부족량은 평균 1,300MW에서 1,700MW에 달했으며, 피크 시간대에는 2,000MW를 초과했다. 쿠바의 전체 전력 수요가 약 3,300MW임을 감안하면 국토의 절반 이상이 매일 강제 단전을 겪어야 하는 수준이다.
발전 설비의 노후화가 근본 원인이다. 소련 시절 기술로 건설된 화력발전소들은 수명을 수십 년 넘긴 상태로, 예비 부품을 구할 외화가 없어 "동류전용(cannibalization)" 방식의 수리가 이뤄지고 있다. 쿠바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24%로 높이고 2,000MW 규모의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현재 태양광 용량은 312MW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약 50MW는 가동되지 않고 있다.
◆ 경제 붕괴와 관광 산업 침체
경제 지표는 더욱 암울하다. 유엔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경제위원회(ECLAC)는 쿠바의 2024년 GDP 성장률을 -1.1%에서 -1.9%로, 2025년은 -1.5%로 전망했다. 일부 신용평가사는 -3.5%까지 예상하고 있다. 이는 2019년 대비 GDP가 11% 이상 증발했음을 의미한다.
공식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2024년 약 30%, 2025년 10월 기준 15.41%로 집계됐으나, 실제 주민들이 생필품을 구매하는 암시장의 인플레이션은 세 자릿수에 육박한다. 2021년 단행된 화폐 개혁의 실패와 긴축 조치로 가계 구매력은 더욱 위축됐다. 경제부 장관 호아킨 알론소(Joaquín Alonso)는 경제 왜곡을 시정하기 위한 정부 프로그램이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관광 산업도 급격히 침체됐다. 2025년 1월부터 11월까지 총 방문객 수는 약 137만 명으로, 2024년 220만 명 대비 29~37% 감소했다. 러시아 관광객은 45.6%, 캐나다 관광객은 23% 줄었다. 호텔 내 정전과 식수 부족, 의료 시스템 붕괴 소식이 확산되면서 캐나다의 대형 여행사 썬윙(Sunwing)은 2024년 말 쿠바 호텔 26곳을 상품 목록에서 제외했다.
◆ "혁명 이후 가장 긴 터널"
이번 전당대회 연기는 과거 사례와 질적으로 다르다. 1991년 소련 붕괴 직후 제4차 대회와 2011년 제6차 대회 연기는 체제 생존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시간 벌기였다. 그러나 2025년의 연기는 이미 실행된 개혁이 실패한 상황에서 제시할 새로운 비전이 없다는 점에서 "전략 부재의 자인"에 가깝다.
미국의 제재 지속과 동맹국의 지원 감소도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은 쿠바를 '테러지원국(SSOT)' 명단에 유지하며 국제 금융 거래를 차단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의 붕괴로 쿠바에 제공하던 값싼 석유가 급감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경제 원조도 축소됐다.
쿠바는 지금 혁명 이후 가장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향후 전당대회 개최 시점은 불투명하며, 에너지 위기의 획기적 해결 없이는 주민들에게 제시할 희망의 서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쿠바공산당 #전당대회연기 #에너지위기 #경제붕괴 #라울카스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