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미얀마 군부가 오는 28일부터 내년 1월까지 3단계에 걸쳐 총선을 강행한다.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 최고사령관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직에 오르기 위한 절차로, 국제사회는 이를 정당성 없는 '대관식'이자 '사기극'으로 규탄하고 있다.
국가행정평의회(SAC) 산하 연방선거관리위원회(UEC)는 28일 102개 타운십을 시작으로 다음달 11일 100개, 25일 63개 타운십에서 순차적으로 투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전체 330개 타운십 중 약 80%에서만 선거가 치러지는 셈이다. 군부는 치안 불안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실제로는 병력을 집중 배치해 결과를 조작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군부의 영토 장악력이 국토의 40% 미만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절차적 정당성조차 결여했다. 2020년 총선에서 압승한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국가고문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강제 해산됐고, 수치 고문은 4년 넘게 구금 상태다. 선거가 예정된 지역 내에서도 161개 와드와 2,770개 마을이 투표 제외 구역으로 지정됐다.
◆ 전자투표기 도입으로 조작 우려 증폭
군부는 이번 선거에서 미얀마 역사상 처음으로 전자투표기(MEVMs)를 도입했다. 종이 투표용지를 사용했던 과거 선거와 달리 디지털 집계 방식을 택했지만, 독립적 참관인이 배제된 상황에서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군부가 선거인 명부 작성을 명목으로 실시한 인구조사가 시민 감시와 반체제 인사 색출에 악용됐다고 지적했다.
군부의 위성 정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은 이미 일부 지역에서 무투표 당선 등으로 28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부는 헌법에 따라 상·하원 의석의 25%를 자동 배정받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 26%만 추가 확보하면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민 아웅 흘라잉은 이 과정을 통해 쿠데타 지도자에서 '합법적' 대통령으로 변신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아웅산 수치 건강 위중…"사망 가능성" 우려도
80세의 아웅산 수치 고문은 네피도 교도소 독방에 갇힌 채 심각한 건강 악화를 겪고 있다. 그의 아들 킴 아리스(Kim Aris)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잇몸 질환과 뼈 통증, 심장 문제로 고통받고 있으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어지럼증과 구토에 시달린다고 밝혔다. 킴 아리스는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든다"며 군부의 정보 차단을 비판했다.
군부는 수치 고문이 "건강하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변호인단의 접견은 물론 가족과의 서신 교환조차 전면 차단된 상태다. 정치범지원협회(AAPP) 집계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는 6,092명, 체포된 인원은 28,051명에 달한다.
◆ 국민통합정부 "테러 집단의 불법 선거" 규정
2020년 총선 당선자들로 구성된 국민통합정부(NUG)는 이번 선거를 "테러 집단의 불법적인 권력 연장 시도"로 규정하고 전면 거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NUG 대테러 중앙위원회는 군부와 연방선거관리위원회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으며, 국민들에게 투표 거부를 호소하는 한편 국제사회에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미얀마는 현재 1948년 독립 이래 가장 격렬한 내전을 겪고 있다. 2023년 10월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주도한 '작전명 1027'로 군부는 북부 샨주와 중국 국경 무역 거점 대부분을 상실했다. 아라칸군(AA)은 라카인주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군부의 행정력은 주요 도시 거점에 고립된 상태다.
◆ 중국, 실리 외교로 군부 지원
중국은 이번 선거의 가장 강력한 배후 지원 세력으로 부상했다. 왕이(Wang Yi) 외교부장은 미얀마를 방문해 민 아웅 흘라잉과 회담하고 "미얀마 주도의 선거"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은 지난 8월 란창-메콩 협력기금(LMC) 특별기금 협약을 체결하고 132개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라카인주 차우크퓨(Kyaukphyu) 심해항 개발도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에게 미얀마는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유일한 육상 통로이자 일대일로(BRI)의 핵심 거점이다. 차우크퓨 심해항은 윈난성으로 이어지는 가스관과 송유관의 기점으로, 중국의 '말라카 딜레마' 해소에 필수적이다. 중국은 군부를 지원하는 동시에 국경 지역 소수민족 무장단체들과도 접촉하는 이중 외교를 펼치고 있다.
◆ 한국, 원칙과 경제적 실리 사이 딜레마
한국 정부는 "포괄적이고 대화가 전제되지 않은 선거는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국회는 군부의 민간인 학살을 규탄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의원들은 NUG 진 마 아웅(Zin Mar Aung) 외교장관과 면담을 갖고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복잡한 입장에 놓여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운영하는 미얀마 서부 해상 쉐(Shwe) 가스전은 군부의 핵심 자금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스전 수익은 군부 직접 통제 하의 미얀마석유가스공사(MOGE)로 흘러들어가며,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 자금이 무기 구입과 제트유 확보에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은 포스코센터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피 묻은 돈" 지급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유엔 안토니오 구테흐스 사무총장과 폴커 투르크 인권최고대표는 이번 선거가 "폭력과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세안은 군부의 비협조를 이유로 2026년 미얀마의 순번 의장국 자격을 박탈했으며, 미국과 유럽연합은 군부 관계자들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이 계속되는 한 제재의 실효성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내년에 미얀마 인구의 3분의 1인 1,600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미얀마 경제성장률을 -2.7%, 물가상승률을 31.0%로 예측했다. 국내 실향민은 360만 명을 넘어섰으며, 군부는 저항군 지역으로의 식량과 의약품 반입을 차단하는 '사면초가' 작전으로 기근을 전쟁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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