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9일(현지시간) 158엔을 돌파하며 지난해 1월 중순 이후 약 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2025년 10월 출범한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정권의 적극 재정 정책과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억제가 맞물린 결과로 분석된다.
시장은 이번 엔화 급락을 '사나에노믹스'의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직후부터 "경기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금리 인상은 신중해야 한다"며 BOJ의 통화 긴축을 노골적으로 견제해왔다. 일본은행이 지난해 1월과 12월 두 차례 금리를 인상해 정책 금리를 0.75%까지 올렸으나, 미국의 5.25~5.50% 수준과는 여전히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교도통신과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은 다카이치 총리가 60%에 육박하는 높은 내각 지지율을 바탕으로 1월 23일 소집되는 정기국회 초반에 중의원을 전격 해산하고 2월 중 조기 총선을 실시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수출 대기업의 실적 호조와 주가 부양이 필수적이며, 일본 정부가 이를 위해 엔저를 용인하는 '이중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카이치 내각이 편성한 2026 회계연도 예산안은 사상 최대인 122조 3천억 엔(약 1,100조 원)에 달한다. 일본의 GDP 대비 국가 부채가 250%를 상회하는 상황에서도 빚을 내서라도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국민민주당과의 정책 협의를 통해 소득세 면세점 상향 조정을 추진 중이며, 아동 1인당 2만 엔의 현금 지급, 가솔린세 잠정 세율 폐지 등 포퓰리즘적 정책도 쏟아지고 있다.
특히 경제 안보를 명분으로 반도체, AI, 우주 항공 등 17개 전략 분야에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홋카이도 치토세의 라피더스(Rapidus) 프로젝트에만 2026년도에 1조 2,300억 엔을 배정하며 국산 2나노 반도체 생산에 사활을 걸고 있다. 라피더스는 2026년 4월 파일럿 라인 가동,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최근 2나노 GAA 트랜지스터 작동 검증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치 지형도 급변하고 있다. 1999년부터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온 공명당이 지난해 10월 연정에서 이탈했다. 공명당의 빈자리는 헌법 개정과 방위비 증액에 적극적인 일본유신회가 채우고 있다. 26년간 지속된 자민-공명 연립의 종언은 일본 정치의 구조적 우경화를 의미한다는 평가다.
엔저는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은 일본과 경합도가 높아 가격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는 미국 시장에서 도요타, 혼다와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과거 10% 이상 저렴했던 한국 차와 일본 차의 가격 격차가 최근 2% 미만으로 좁혀졌다.
한국 철강 산업은 구조적 수요 부진, 관세 장벽, 엔저 공세라는 3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포항 제철소 2공장이 수익성 악화로 가동을 중단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산 철강재가 동남아 등 제3국 시장에서 한국산의 점유율을 잠식하고 있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13일부터 이틀간 일본 나라현을 방문해 다카이치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는 지난해 10월 경주 회담에 이은 두 번째 셔틀 외교다. 북한 핵 위협에 대응한 한·미·일 안보 협력 유지,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 등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해 12월 9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독도에 대해 "일본 고유의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 대통령실은 즉각 "독도는 명백한 우리 영토"라고 반박했으나, 이재명 대통령은 "양국 관계의 큰 틀을 위해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며 확전을 자제하는 전략적 인내를 보여줬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도 일본에 변수가 되고 있다.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은 "엔화 약세가 과도하다"며 구두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는 동시에 대미 무역 흑자 축소를 위해 미국산 에너지 수입 확대를 종용하고 있다.
유라시아 그룹은 "높은 생활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카이치 총리의 지지율은 급락할 것"이라며 스태그플레이션 리스크를 경고했다. 일본의 핵심 물가상승률은 3.0%를 기록하며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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