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이사회는 9일(현지시간)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Mercosur)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서명을 승인했다. 1999년 협상 개시 이후 25년 만에 성사된 이번 합의는 세계 인구의 약 10%와 국내총생산(GDP)의 20%를 포괄하는 거대 경제권을 형성한다. 단순한 관세 철폐를 넘어, 지정학적 불안 속에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과 공급망 다변화를 겨냥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투표는 회원국 만장일치가 아닌 가중다수결 방식으로 진행됐다. 프랑스는 폴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아일랜드와 함께 반대 연합을 구축했으나, 이탈리아가 막판에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저지선은 붕괴됐다. 이탈리아의 선회는 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이 제안한 4,500억 유로 규모의 농업 지원 패키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탈리아 농업부 장관 프란체스코 롤로브리지다(Francesco Lollobrigida)는 “이 합의를 통해 이탈리아는 약 100억 유로를 확보하고 농촌 개발 기금의 사용 규제를 완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멜로니(Giorgia Meloni) 총리가 국내 농민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동시에 수출 산업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명분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정치적 고립에 직면했다.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은 “프랑스는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으나, 가중다수결 구조 속에서 거부권은 무력화됐다. 이에 프랑스 농민단체 FNSEA와 농촌조정연합은 파리 도심을 트랙터로 봉쇄하며 격렬히 항의했고, 극우 국민연합(RN)과 좌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는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며 정권을 압박했다.
이번 협정은 EU 역사상 최대 규모의 관세 철폐를 포함한다. EU는 메르코수르산 수입품의 92%, 메르코수르는 EU산 수입품의 91%에 대해 단계적으로 관세를 철폐한다. 특히 자동차와 기계류, 화학제품 등 산업재 분야에서 유럽 기업들은 연간 40억 유로 이상의 관세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농업 부문에서는 소고기와 가금류 등 민감 품목에 대한 쿼터가 설정되어 회원국 농민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협정에는 시장 가격이 5% 이상 하락할 경우 자동으로 조사에 착수하는 ‘안전장치 조항’이 포함됐다. 또한 환경·위생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농산물은 수입을 차단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농업 보호 장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환경 단체들은 무역 파트가 먼저 발효될 경우 정치·협력 파트의 비준이 지연되면서 아마존 열대우림 보호 등 핵심 의제가 약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식 서명식은 1월 17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후 유럽의회 비준이 남은 관문으로, 찬성 세력은 중도우파와 자유주의 성향 의원들, 반대 세력은 녹색당과 좌파 그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협정은 유럽이 보호주의를 넘어 전략적 확장을 선택했음을 보여주지만, 농민 반발과 환경 논란은 향후 이행 과정에서 지속적인 갈등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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