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놈펜 현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모습/보도영상 캡춰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은 22일 프놈펜 현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지난 2년간 접수된 한국인 납치·감금 신고 550건 가운데 약 100건이 여전히 미해결 상태라고 밝혔다. 이는 캄보디아 내 한국인 대상 조직범죄가 정부의 공식 인정을 통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것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사관이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2023년 20건에 미치지 못했던 관련 신고는 2024년 220건으로 급증했으며, 올해는 8월까지만 330건이 접수돼 이미 전년도 수치를 훌쩍 넘어섰다. 이러한 폭발적 증가세는 개별 사건이 아닌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범죄 산업이 한국인을 표적으로 삼고 있음을 시사한다.

현지 국정감사를 진행한 여야 의원들은 대사관의 대응 미비점을 집중 질타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강력히 요구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의원은 대사 임명이 장기간 지연된 상황을 지적하며 "대사 대리가 한국인 사망 사건의 기본적인 후속 조치 과정조차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텔레그램 통한 '고수익 일자리' 미끼로 20~30대 청년층 표적

범죄 조직은 소셜미디어, 특히 텔레그램을 통해 '월천 보장', '초보자 가능', '숙식 및 항공권 제공' 등 거부하기 힘든 조건으로 구직자를 유혹한다. 특별한 기술이나 경력이 필요 없다는 점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20~30대 남성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간다.

피해자들은 합법적인 해외 취업의 기회라고 믿고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오른다. 일부 조직은 신뢰를 얻기 위해 주민등록등본이나 인감증명서 같은 공식 서류를 사전에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는 도착과 동시에 신분 도용 범죄에 악용된다.

캄보디아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약속은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마중 나온 조직원들은 피해자들의 여권, 휴대전화, 소지품을 즉시 빼앗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차단한다. 이후 무장 경비원들이 지키는 거대한 건물로 이송돼 사실상의 감금 생활을 시작한다.

하루 17시간 강제 노동, 보이스피싱·로맨스 스캠 범죄 도구로 전락

감금된 이들은 하루 최대 17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노동 시간 동안 다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도구가 되도록 강요받는다. 가짜 신분으로 접근해 연인 관계인 것처럼 신뢰를 쌓은 뒤 돈을 뜯어내는 로맨스 스캠, 높은 수익률을 미끼로 가짜 투자 사이트로 유인해 돈을 가로채는 투자 리딩방 사기, 보이스피싱 및 스미싱 등을 저질러야 한다.

할당된 실적을 채우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반항의 기미를 보이면 즉각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이 뒤따른다. 상습적인 구타와 굶기기, 독방 감금이 일상이며, 전기 충격기는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한 주요 도구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강제로 보게 하여 극도의 공포심을 심어주며, 일부 증언에 따르면 마약을 강제로 투약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단지 내부에는 시신을 처리하기 위한 소각장이 존재한다는 증언도 나온다. 이는 실제 사망자 수가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을 수 있으며, 범죄 조직이 살인을 포함한 극단적인 폭력을 은폐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출입국 통계 '연간 3천명 행방불명' 시사, 공식 발표의 30배

이 위기의 실제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결정적인 데이터는 법무부의 출입국 통계에서 드러난다. 박찬대 의원실을 통해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캄보디아로 출국한 한국인과 다시 입국한 한국인 수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2021년 113명에 불과했던 이 차이는 2022년 3,209명, 2023년 2,662명, 2024년 3,248명으로 폭증했다. 이는 매년 수천 명의 한국인이 캄보디아로 향한 뒤 행방이 묘연해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대사관이 발표한 '미해결 100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중국계 자본과 한국인 가담자 1천~2천명 추산

모든 증거는 이 거대한 범죄 산업의 정점에 중국계 초국적 범죄 조직이 있음을 가리킨다. 범죄 단지를 일컫는 용어인 '웬치(园区)' 자체가 중국어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자본과 총괄 운영을 담당한다.

충격적이게도 상당수의 한국인이 피해자가 아닌 자발적 가담자, 관리자, 심지어 신규 인력 모집책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약 1천명에서 2천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이러한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캄보디아에서 송환된 64명 대부분이 보이스피싱·로맨스 스캠 등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활동 공간인 '웬치'는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다. 높은 벽과 철조망, 무장 경비원들로 둘러싸인 거대한 요새형 복합 단지다. 과거 카지노, 호텔, 리조트 등으로 개발되던 건물들이 범죄의 소굴로 변모한 경우가 많다.

캄보디아 부패 구조가 범죄 비호, 현지 경찰 '합의 종용'도

유엔(UN)과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기구들은 캄보디아에 만연한 시스템적 부패가 범죄 기업들이 아무런 처벌 없이 활개 칠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일관되게 지적한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캄보디아 일부 권력층이 경제특구나 카지노 등을 사실상의 '면허받은 범죄 구역'처럼 운영하며 범죄 조직과 결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조차 피해자들에게 현지 경찰 신고 절차가 매우 더디며,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는 데만 수일에서 일주일이 소요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부 현지 경찰은 범죄 수사를 진행하는 대신 피해자에게 가해자들과 '합의'하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정부 고위급 대응팀 급파, 훈 마네트 총리와 직접 담판

정부는 외교부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박일 전 주레바논대사를 단장으로 하는 '캄보디아 취업사기·감금 피해 대응 태스크포스(TF)'가 공식 발족됐으며, 외교부 제2차관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이 포함된 고위급 정부 합동 대응팀이 프놈펜 현지에 급파됐다.

합동 대응팀은 훈 마네트 캄보디아 총리를 직접 만나 한국 정부의 심각한 우려를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 측은 더욱 적극적인 범죄 단속, 한-캄보디아 스캠범죄 합동대응 TF 구성, 캄보디아 내 구금된 한국인 범죄 연루자의 신속한 송환 등을 강력히 요청했다. 캄보디아 측은 한국인 사망에 대한 유감을 표하고 협력을 약속하면서도, 한국의 여행경보 격상 조치가 자국 관광 및 투자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경보 하향을 요청했다.

보코산·바벳·포이펫 '여행금지' 발령, 시아누크빌 '출국권고'

외교부는 한국인 사망자가 발견된 캄폿주 보코산 지역과 대표적인 범죄 거점인 바벳, 포이펫 시에 대해 최고 단계인 4단계 '여행금지'를 발령했다. 또한 시아누크빌주에는 3단계 '출국권고'를 발령하는 등 캄보디아 전역의 경보 단계를 상향 조정했다.

이러한 조치는 단순한 안전 권고를 넘어 캄보디아 경제의 중요 축인 관광 및 투자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준제재 성격의 외교적 압박 수단이다. 훈 마네트 총리가 직접 경보 하향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이 조치가 캄보디아 정부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정부는 현지 경찰청 내에 한국 경찰이 상주하며 소통을 돕는 '코리안 데스크' 설치를 추진하고, 아세안(ASEAN) 국가들과의 국제 공조협의체 신설을 계획하는 등 장기적인 사법 공조 체계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한인회 "매주 10건씩 구조 요청, 자비로 숙식비·벌금 부담"

캄보디아 현지 한인회는 절박한 구조 요청 전화를 받고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복잡하고 부패에 노출된 현지 행정 절차를 대신 밟아주는 등 사실상의 구조대 역할을 하고 있다. 교민들은 자비를 털어 탈출자들의 숙식비는 물론 여권 재발급 수수료나 수백만 원에 달하는 불법체류 벌금까지 대신 내주고 있다.

구조 활동에 앞장서는 한인회 관계자들은 범죄 조직으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는 등 신변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한 교민은 "좋을 땐 가만히 있다가 위협을 당할 때만 도와달라고 하니 안타까우면서도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번 사태로 '캄보디아=범죄 소굴'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교민 사회 전체가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 한국 정부의 여행경보 격상 이후 한국인 관광객과 사업가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이들을 상대로 식당, 숙박업, 여행업 등을 운영하던 교민들의 생계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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