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로 생존 위기에 몰린 북극곰이 유전자를 스스로 변형시키며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University of East Anglia, UEA) 연구팀은 11일(현지시간) 남동부 그린란드 북극곰 개체군에서 '점핑 유전자'로 불리는 전이인자가 급격히 활성화되며 대사 및 열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UEA의 앨리스 고든(Alice Godden) 박사 연구팀은 학술지 《모바일 DNA(Mobile DNA)》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기후 변화가 야생 포유류의 DNA 변형을 유발하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최초로 규명했다. 연구팀은 남동부 그린란드(Southeast Greenland, SEG)와 북동부 그린란드(Northeast Greenland, NEG)에 서식하는 북극곰의 혈액 전사체를 분석한 결과, 두 집단 간 특정 유전자 활동성에 현저한 차이가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핵심 발견은 남동부 그린란드 곰들에게서 게놈 내 위치를 이동할 수 있는 DNA 조각인 전이인자의 활동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지방 대사, 열 스트레스 반응, 심혈관 기능과 관련된 유전자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됐다. 연구진은 이 같은 유전적 변화가 남동부 그린란드의 파편화된 해빙 환경과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온, 그리고 전통적인 해표 중심 식단에서 육상 먹이원으로의 강제적 전환 압력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남동부 그린란드 개체군은 해빙이 연중 4개월 미만 존재하는 극한 환경에서 빙하 멜란지(Glacial Mélange)라 불리는 담수 얼음 조각을 사냥터로 활용하며 생존해왔다. 이들은 서쪽의 그린란드 빙상과 동쪽의 덴마크 해협에 가로막혀 약 200년간 다른 북극곰 집단과 유전적 교류 없이 고립됐다.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크리스틴 레이드(Kristin Laidre) 교수팀이 2022년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이 지역 북극곰들은 전 세계 다른 개체군과 구별되는 독특한 서식 환경과 유전적 고립을 특징으로 한다.
고든 박사는 "남동부 그린란드 곰들에서 관찰된 변화는 곰들이 자신의 DNA를 빠르게 재작성하는 필사적인 생존 메커니즘"이라며 "이는 반드시 긍정적인 적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전이인자의 무작위적 삽입은 유익한 돌연변이뿐 아니라 암 유발이나 필수 유전자 파괴 등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부 언론에서 북극곰이 식물성 식단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연구진은 이를 정확히 수정했다. 북극곰은 불과 479,000~343,000년 전 불곰에서 분화된 이후 해양 포유류 지방 소화에 극도로 특화된 절대 육식동물로 진화했다. 식물성 섬유소를 분해할 장내 미생물군이나 긴 소화관을 갖추지 못해 베리류나 해조류 같은 육상 먹이원은 생존에 필요한 열량을 충족시킬 수 없다. 연구진이 언급한 유전적 변화는 채식 적응이 아니라 영양 결핍 상황에서 미량의 영양분이라도 효율적으로 추출하기 위한 대사적 방어 기제로 해석된다.
이번 발견은 2050년까지 전 세계 북극곰의 3분의 2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새로운 변수를 제공한다. SEG 개체군은 2024년 6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북극곰 전문가 그룹 회의에서 전 세계 20번째 독립 개체군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이는 기후 변화 시나리오에서 독특한 적응 형질을 가진 소수 집단의 보존 가치를 국제사회가 공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3월 북극 해빙의 최대 범위는 1,433만㎢로 47년 위성 관측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8월에는 그린란드 빙상 전체 온도가 평년보다 3도 이상 상승하며 대규모 용해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남동부 그린란드 곰들의 생명줄인 빙하 멜란지 서식지마저 소멸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북극 이사회 옵서버 국가인 한국은 극지연구소를 통해 그린란드, 영국, 미국 연구기관과 유전체 분석 및 생태 모니터링 공동 연구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극곰의 유전적 변형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생물학적 지표로서 국제 탄소 배출 감축 협상에서도 활용 가능한 과학적 근거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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