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고속열차 'EMU-370'/현대로템 자료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고속철도 기술 자립국 대열에 올라섰다. 국토교통부와 현대로템이 지난달 차세대 고속열차 'EMU-370'의 핵심 기술 개발 완료를 22일 공식 발표하면서, 2031년 영업운전 속도 370km/h의 초고속 열차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이는 1994년 프랑스로부터 기술을 도입한 이래 30여년간 축적해온 독자 기술력의 집대성이자, 한국 철도가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도약하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EMU-370은 최고 설계속도 407km/h, 영업운전 속도 370km/h를 목표로 개발됐다. 2022년부터 4년간 총 225억원이 투입된 이 국가 연구개발 프로젝트는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의 지원 아래 현대로템이 주관했으며, 2025년 핵심 기술 개발을 마치고 2030년 시운전에 들어갈 예정이다. 전국을 1시간대 생활권으로 재편하는 이 계획은 국가 기간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핵심 기술력은 560kW급 고출력 영구자석 동기전동기(PMSM)에서 찾을 수 있다. 기존 KTX-청룡(EMU-320)의 380kW급 유도전동기 대비 출력을 47.4% 향상시킨 이 모터는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면서도 차량 경량화를 가능케 했다. 회전자에 영구자석을 매립해 전력 손실을 원천 차단한 설계가 주효했다는 평가다. 370km/h 초고속 영역에서 급증하는 공기저항을 극복하고, 한국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도 안정적 주행을 보장하는 강력한 견인력이 확보된 것이다.
고속철도차량의 주요 소음원(청색)과 소음 차단 구조(적색)/현대로템 자료
소음과 진동 제어 기술도 눈길을 끈다. 개발진은 전산유체역학 시뮬레이션을 통해 전두부를 유선형으로 정밀 설계하고, 팬터그래프와 에어컨 등 돌출 장치를 차체 내부로 매립했다. 그 결과 KTX-청룡 대비 주행저항 10% 이상, 공력저항 15.1% 저감에 성공했다. 차체 압출재를 허니콤 구조로 설계해 외부 소음의 실내 유입을 차단하는 차음 기술도 적용됐다. 370km/h 고속 주행 중에도 정숙한 실내 환경을 구현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주행 안정성 확보를 위한 현가장치와 대차 기술도 고도화됐다. 초고속 주행 시 치명적 불안정 요소인 사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능동형 진동 제어 시스템이 도입됐다. 대차의 공기 스프링과 댐퍼 감쇠력을 최적화하고, 횡방향 진동을 실시간으로 감지해 상쇄시키는 이 시스템은 400km/h급 설계속도에서도 안전한 주행을 담보한다. 2030년 시운전 단계에서 집중 검증을 거쳐 2031년 상용화 시 최종 안전장치로 작동할 예정이다.
EMU-370은 중국의 CR450, 일본의 ALFA-X, 프랑스의 TGV-M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경쟁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중국 CR450이 영업속도 400km/h, 시험 주행 453km/h를 기록하며 절대 속도에서 앞서지만, EMU-370은 한국형 지형에 최적화된 가감속 능력과 에너지 효율성에 집중했다. 산악 지형의 곡선 구간과 짧은 역간 거리에서 표정속도를 유지하는 데는 동력분산식 특유의 강점이 발휘된다는 분석이다.
유럽 모델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프랑스 TGV-M이 320km/h 대역에 머무는 상황에서 EMU-370의 370km/h 성능은 속도 면에서 유럽 전통 강국들을 능가한다. 터널이 많은 한국 지형에서 검증된 기밀 유지 기술과 소음 저감 기술은 유사 지형 조건을 가진 국가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전망이다. 일본 ALFA-X의 혁신적 제동장치와 독일 벨라로 노보(Velaro Novo)의 에너지 절감 기술에 맞서, EMU-370은 고성능과 가성비의 균형을 맞춘 전략 모델로 포지셔닝됐다.
EMU-370의 성능을 뒷받침할 인프라도 구축 중이다. 현재 진행 중인 평택-오송 2복선화 사업은 EMU-370 도입과 궤를 같이하는 핵심 프로젝트다. 경부고속선과 호남고속선이 합류하는 이 구간은 선로 용량 포화로 운행 횟수 증대에 걸림돌이 돼왔다. 2복선화 완료 시 선로 용량이 2배로 늘어나며, 국내 최초로 설계속도 400km/h로 건설되는 이 구간은 EMU-370의 유일한 테스트베드이자 상용 운전 구간이 될 것이다.
46.95km 구간 중 34km가 터널로 구성되는 이 사업은 대심도 지하 공간을 활용해 지상 용지 보상 비용을 최소화하고 민원을 줄였다. 직선화된 선형 확보로 고속 주행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동시에, 향후 GTX 등 대심도 광역철도망 구축에도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전망이다.
한국 고속철도의 기술 자립은 30년 긴 여정의 산물이다. 1994년 프랑스 알스톰(Alstom)으로부터 TGV 기술을 도입하며 시작된 고속철도 개발은 2004년 KTX-I 개통, 2010년 독자 모델 KTX-산천 상용화를 거쳐 동력분산식 시대를 열었다. 2012년 시제차량 HEMU-430X가 최고 시속 421.4km를 기록하며 기술력을 입증했고, 2021년 KTX-이음(EMU-260), 2024년 KTX-청룡(EMU-320) 상용화로 이어졌다.
차세대 고속열차 'EMU-370'/현대로템 자료
EMU-370은 과거 해외 의존도가 높았던 제동 시스템, 추진 제어 장치, 신호 시스템(KTCS-3) 등 핵심 부품의 국산화율을 9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외부 기술 간섭 없이 독자적인 해외 수출과 유지보수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기술 주권 확립을 의미하며, 2031년 EMU-370 상용화는 한국 철도 기술사의 완성을 상징하는 정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철도 시장 공략도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 6월 현대로템이 우즈베키스탄 철도공사와 체결한 2,700억원 규모의 고속철도 공급 계약은 한국형 고속철도의 첫 해외 수출 사례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KTX-이음 기반의 동력분산식 열차가 공급되는 이 계약은 한국 정부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통한 0.1% 초저금리, 35년 상환 조건의 차관 제공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국 일대일로 자금이 높은 금리와 자산 담보로 '부채의 덫' 논란을 일으킨 것과 달리, 한국은 착한 개발금융 모델을 제시하며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굳혔다는 평가다. 기존 스페인 탈고(Talgo) 열차를 운용하던 우즈베키스탄이 한국형 EMU를 선택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 내 한국 철도 기술 표준 확산 가능성도 커졌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주변국으로의 추가 수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폴란드와 사우디아라비아 시장도 공략 중이다. K2 전차, K9 자주포 등 방산 협력으로 다져진 폴란드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2026년 이후 발주될 폴란드 신공항 연계 고속철도 사업에 EMU-370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대 인프라 프로젝트 네옴시티(NEOM)의 지하 고속철도망 건설 시장도 타겟이다. 현대로템은 EMU-370급 초고속 열차의 기술력을 적극 홍보하며 사우디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오는 9월 서울에서 열릴 글로벌 인프라 협력 컨퍼런스(GICC 2025)는 EMU-370 기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 핵심 무대가 될 전망이다. 페루, 모리셔스, 타지키스탄 등 주요 인프라 발주국 장관급 인사들과 글로벌 발주처 CEO들이 대거 참석하는 이 행사에서, 한국 정부는 EMU-370 기술력과 EDCF 금융 패키지를 결합한 토털 솔루션을 제안할 계획이다. 2030년 약 76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글로벌 철도 시장에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전방위 세일즈 외교가 펼쳐질 예정이다.
EMU-370이 가져올 경제적 파급 효과도 주목된다. 도입 시 서울-부산 간 이동 시간은 1시간 50분대, 서울-광주는 1시간 10분대로 단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국이 실질적 단일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기업 활동 효율성이 극대화되고, 지방 기업들의 수도권 자원 접근성도 개선될 전망이다. 이동 시간 단축은 관광 산업 활성화로도 이어져 강원, 호남 등 관광 자원 풍부 지역의 경제적 수혜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대도시로 인구와 경제력이 집중되는 빨대 효과 우려도 제기된다. 서울 접근성 개선으로 지방의 쇼핑, 의료, 교육 수요가 서울로 흡수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방 정차역 주변을 복합환승센터로 개발하고, 지역 특화 산업을 육성해 자체 흡입력을 갖추게 하는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EMU-370은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로도 주목받는다. 고속철도를 통한 시간의 민주화는 거주 지역에 따른 기회 불평등을 완화하고, 보편적 이동권을 보장한다. 누구나 합리적 비용으로 국토 어디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는 헌법상 거주 이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확장하며, 공간적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물리적 거리 단축은 지역 간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심리적 거리감을 줄여, 지역감정 해소와 사회적 통합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간 중심의 기술 철학도 EMU-370 설계에 투영됐다. KTCS-3 같은 첨단 신호 체계는 인적 오류를 시스템적으로 방지해 승객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진 감지 센서와 화재 감시 시스템 등 다중 안전장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지킨다. 소음과 진동을 극한으로 억제한 설계는 승객을 단순한 운송 대상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며, 이동 시간조차 휴식과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한 인본주의적 접근이다.
기후 위기 시대 생태적 이동의 대안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고속철도는 항공기 대비 탄소 배출량이 약 4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200km 이동 시 고속철도는 1인당 약 5.4k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반면, 항공기는 219kg을 배출한다. EMU-370 도입으로 서울-부산 간 항공 수요가 철도로 전환된다면, 국가 전체의 탄소 배출량 저감에 획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한 디자인과 고효율 모터, 재활용 가능 소재 사용은 자연과 공존하려는 자연주의적 기술 윤리의 실천이다.
2031년, 한반도를 달릴 EMU-370은 30년간 축적한 기술의 결정체이자 미래 30년을 향한 희망의 화살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으로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동시에, 전국을 하나로 묶어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고 인간을 존중하며 지구를 지키는 길을 제시한다. 단순히 빠른 열차를 넘어, 대한민국을 더 평등하고 인간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끄는 가치의 기관차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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