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7월 한국과 구두 합의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을 일본의 5500억 달러 수준으로 대폭 증액하고, 투자 방식도 현금 기반 직접 투자로 전환하라고 강력히 압박하고 있어 양국 무역협상이 심각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한국 측에 투자 총액을 "일본의 5500억 달러 약속에 더 가까운" 수준으로 늘리고, 대출이나 신용 보증이 아닌 직접적인 현금 지분 투자 비율을 대폭 높이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날 백악관에서 한국의 3500억 달러 약속을 "선불(up front)"이라고 공개적으로 규정하며 즉각적이고 유동적인 자본 이전을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을 강력히 뒷받침했다. 그는 한국의 3500억 달러를 일본의 5500억 달러, EU의 9500억 달러와 함께 미국으로 "들어오는" 자금으로 묶어 언급하며 압박 강도를 높였다.
7월 구두합의, 모호성이 발목
현재 교착 상태의 근본 원인은 7월 30일 양국이 도출한 '구두 합의'의 불안정한 기반에 있다. 당시 합의는 트럼프 대통령이 설정한 8월 1일 마감시한을 이틀 앞두고 극적으로 타결됐다.
미국은 한국산 제품에 부과하려던 25% 상호관세율을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 투자 패키지와 별도로 1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서명된 공식 문서가 아닌 구두 합의에 불과했고, 투자의 구체적 구조와 자금 조달 방식, 수익 분배 모델 등 핵심 세부사항이 모두 미정 상태로 남겨졌다.
한국 정부는 이 투자를 조선, 반도체, 바이오 등 자국 강점 산업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미국 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펀드' 개념으로 이해했다. 반면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합의 직후부터 이를 "미국 대통령이 지정하는 미국 소유의 산업 및 부문에 대한" 투자라고 규정하며 근본적인 시각차를 드러냈다.
'일본 모델' 압박 도구로 활용
미국은 최근 타결된 미-일 합의를 한국 압박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러트닉 장관은 공개적으로 "일본은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거론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한국을 문제 삼는 듯한 발언을 이어갔다.
일본 모델의 핵심은 5500억 달러 규모 펀드가 전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재량과 지시에 따라 집행되며, 투자 대상 프로젝트는 상무장관이 의장을 맡는 미국 정부 위원회에서 선정한다는 점이다. 투자로 발생하는 수익은 초기 투자비 회수 후 미국이 90%, 일본이 10%를 가져가는 구조다.
또한 일본이 약속된 투자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관세율을 다시 높은 수준으로 되돌릴 수 있는 '부메랑 조항(boomerang clause)'도 포함됐다.
韓, 외환위기 재현 우려 표명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3500억 달러 이상의 현금 투자는 8월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고 4160억 달러의 84% 이상을 소진시킬 수 있어 금융 안정성에 실존적 위협이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대로 안전장치 없이 전액 현금 투자를 단행할 경우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협상을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원/달러 환율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1410원을 돌파했으며, 코스피 주가지수는 관세 우려로 급락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양자간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을 현금 기반 투자 이행의 핵심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으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러트닉, "흑백논리" 최후통첩
러트닉 장관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그 합의를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 흑백논리다(Black and white)"라며 사실상의 최후통첩을 날렸다.
반면 한국 대통령실은 "시간에 쫓겨 우리 기업에 큰 손실을 주는 합의에 서명할 수 없다"며 "국익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조건은 수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상업적으로 합리적인(commercially reasonable)"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국내 정치적 압박도 가중
전례 없는 규모의 국가 자산이 동원되는 만큼 이 합의는 국회 비준 동의를 거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정부는 거센 정치적 반대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조지아주 현대차-LG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급습 사건으로 300명 이상의 한국인 근로자가 구금되면서 대미 여론이 크게 악화됐다. 이는 미국에 과도한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국내 정치적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
글로벌 통상질서 재편 시험대
WSJ는 이번 협상의 결론이 트럼프 행정부가 수십 개 국가와 진행 중인 광범위한 관세 협상의 성패를 가늠하는 "핵심 바로미터(key barometer)"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세 가지 시나리오가 전망된다. 첫째는 한국이 일본 모델보다 낮은 수준에서 투자 패키지의 현금 비중을 일부 상향 조정하고 미국이 통화스와프에 합의하는 '강요된 타협', 둘째는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25% 관세가 확정 부과되는 '협상 결렬', 셋째는 의미 있는 진전 없이 교착 상태가 장기화되는 '불안정한 현상 유지'다.
분석가들은 이번 협상이 '미국 우선주의' 통상 원칙이 동맹 관계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시험 사례이며, 그 결과가 향후 미국이 다른 동맹국들을 대하는 방식에 중요한 선례를 남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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