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제이비어 브런슨 한미연합사령관이 제시한 '병력보다 전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한미동맹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며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주한미군의 역할이 한반도를 넘어 인도-태평양 전역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한국 정부의 전략적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병력보다 전력', 새로운 주한미군 독트린

브런슨 사령관은 8일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동맹의 미래상을 제시했다. 그는 주한미군의 역량에 대한 논의가 "병력의 숫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력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병력 감축 가능성을 시사하는 동시에, 첨단 기술로 억제력을 유지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전력'의 핵심은 다영역 특임부대(MDTF)다. 이 부대는 지상, 공중, 해상, 우주, 사이버를 아우르는 통합 작전 능력을 갖춘 미래전의 핵심 자산이다.

브런슨 사령관은 '동맹 현대화'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그는 위협의 대상을 "국경 북쪽의 핵무장한 적"뿐만 아니라 "북한과 연계된 러시아의 점증하는 개입"과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에 대한 중국의 위협"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이는 주한미군의 임무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체로 확장되었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핵심 개념인 '전략적 유연성'은 "필요한 시간과 공간에 군사력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 최근 주한미군 패트리엇 포대가 중동에 재배치된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주한미군 자산이 한반도를 넘어 미국의 세계 전략에 따라 운용될 수 있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국내의 파장과 분열된 시각

브런슨 사령관의 발언 직후, 국내 언론은 미군 감축 가능성에 집중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주한미군 관계자와 한국 국방부, 외교부는 "병력 감축 언급은 없었다"거나 "결정된 바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이는 정책 결정자에게는 변화의 메시지를, 대중에게는 안정감을 주려는 '이중 트랙 소통 전략'으로 분석된다.

언론의 반응은 진보와 보수로 뚜렷이 나뉘었다. 한겨레신문 등 진보 매체는 '전략적 유연성'이 한국을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에 동원하고, 대만 해협 분쟁에 휘말리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중앙일보 등 보수 매체는 이를 변화하는 안보 환경에 대한 현실적 대응으로 평가했다. 또한 한국의 방위 역량 강화와 방위비 분담 증액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 출범한 이재명 행정부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남북 대화를 선호하는 정부 입장에서 동맹국의 대립적 역할 강화 요구는 큰 부담이다. 정부가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는 것은 다가올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협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북한과 중국의 '계산된 침묵'

북한과 중국은 브런슨 사령관의 발언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내지 않았다. 북한은 대신 기자회견 직후 시작된 을지 자유의 방패 연합군사연습을 '북침 전쟁연습'이라며 맹비난하고 박격포 사격 훈련으로 맞대응했다. 이는 발언 자체보다 군사 행동에 초점을 맞춘 대응으로, 그의 발언을 군사 훈련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중국 역시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은 브런슨 사령관의 '중국 위협' 언급을 미국의 대중국 봉쇄 전략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활용하며 기존 입장을 강화하는 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기로에 선 한미동맹

브런슨 사령관의 기자회견은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의제를 설정하려는 정교한 사전 작업의 성격이 짙다. 방위비 증액과 같은 민감한 요구를 '군사적 필요성'으로 포장해 한국을 압박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번 발언으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전작권 전환이 한국군의 기술적 현대화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에 연계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전환 시간표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주한미군의 전통적 '인계철선(tripwire)'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 한반도에 고정된 억제력에서 인도-태평양 전역의 위기에 대응하는 유연한 군사력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격변하는 안보 지형 속에서 동맹의 미래와 자국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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