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Kassym-Jomart Tokayev) 카자흐스탄 대통령/AI편집
타지키스탄 두샨베에서 열린 제2차 중앙아시아-러시아 정상회의에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Kassym-Jomart Tokayev)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자국 내에 '역내 원자력 연구협의회' 설립을 제안하면서 중앙아시아 원자력 패권 경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토카예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제안한 기구의 정식 명칭은 '원자력 연료 주기 및 방사성 폐기물 관리 분야 역내 역량 협의회(Regional Council of Competencies in the field of the nuclear fuel cycle and radioactive waste management)'다. 이는 단순한 학술 교류를 넘어 원자력 발전의 핵심인 핵연료 주기와 폐기물 관리라는 고부가가치 분야에서 중앙아시아의 표준을 주도하겠다는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이 구상의 명분으로 경제 발전을 내세웠다. 그는 원자력 산업 협력이 "광범위한 관련 산업 분야의 발전을 보장할 것"이며, 이는 카자흐스탄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critically important)"고 강조했다.
러시아 기술력에 기반한 인재 양성 전략
주목할 점은 이번 제안의 기반으로 최근 알마티에 개교한 러시아 국립연구핵대학교(MEPhI) 분교가 명시적으로 언급됐다는 것이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이를 "이 방향으로의 첫걸음"이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국영 원자력 기업 로사톰(Rosatom)의 핵심 교육기관인 국립연구핵대학교는 원자력 물리학자와 엔지니어 등 최고급 인력을 배출하는 세계적 명성의 대학이다. 알마티 분교 설립은 러시아의 원자력 교육 및 기술 표준을 카자흐스탄에 직접 이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양성될 인력들은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수형 수냉식 원자로 기술과 핵연료 주기 표준에 익숙해지게 되며, 이는 향후 역내 원자력 시장에서 러시아 기술의 지속적인 우위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할 전망이다.
세계 최대 우라늄 생산국의 전략적 전환
카자흐스탄의 이번 구상은 이 나라가 걸어온 독특한 핵 역사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소련 붕괴 후 세계 4위 규모의 핵무기를 물려받았던 카자흐스탄은 1995년까지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로 이전하고 핵 시설을 해체했다. 냉전 시기 450회가 넘는 소련의 핵실험이 자행됐던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 핵실험장을 영구 폐쇄한 것은 비핵화 의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비핵화 성과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저농축우라늄 은행 유치로 이어졌다. 카자흐스탄 동부 우스트-카메노고르스크(Ust-Kamenogorsk)의 울바(Ulba) 야금 공장에 위치한 이 시설은 국제원자력기구가 직접 소유하고 운영하며, 상업 시장에서 핵연료 공급에 차질이 생긴 회원국에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이처럼 민감한 시설의 유치국이 됐다는 사실은 카자흐스탄이 핵연료 주기를 책임감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신뢰받는 파트너임을 국제사회가 공인한 것이다.
현재 카자흐스탄은 전 세계 우라늄 공급의 약 4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을 보유하고 있다. 국영기업 카자톰프롬(Kazatomprom)은 '물량보다 가치(Value over Volume)' 전략을 통해 국제 우라늄 가격을 관리하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원자력 부흥은 절박한 국내 사정에서 비롯됐다. 소련 시절 건설된 노후 석탄 화력발전소가 전력 생산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정부는 206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원자력 발전을 현실적 대안으로 선택했다.
지난해 10월 실시된 원자력 발전소 건설 국민투표에서 70%가 넘는 압도적인 찬성을 얻은 카자흐스탄은 최소 3기의 원전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첫 번째 원전은 러시아 로사톰이 주도하는 국제 컨소시엄에, 두 번째와 세 번째 원전은 중국 중국핵공업집단(CNNC)에 맡기기로 했다. 이는 거대한 두 이웃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피하고 경쟁을 유도하려는 균형 외교의 일환이다.
우즈베키스탄과의 주도권 경쟁 본격화
카자흐스탄의 야망은 역내 라이벌인 우즈베키스탄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변수에 직면했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로사톰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대형 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 건설을 동시에 추진하며 공격적으로 원자력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스스로를 "중앙아시아의 원자력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결정적으로, 토카예프 대통령이 두샨베 정상회의에서 자신의 구상을 발표했을 때,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역시 동일한 회의에서 우즈베키스탄 내에 타슈켄트 국립연구핵대학교 분교를 기반으로 한 '역내 원자력 역량 센터(Regional Competence Center for Nuclear Energy)' 설립을 제안했다. 이는 카자흐스탄의 제안에 대한 명백한 맞불이자, 역내 원자력 분야 주도권을 둘러싼 양국 간 경쟁이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양국은 각기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압도적인 우라늄 생산량, 카자흐스탄 재료시험 토카막(KTM) 같은 첨단 연구 인프라,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 저농축우라늄 은행 유치를 통한 국제적 신뢰도를 강점으로 내세운다. 반면 우즈베키스탄은 보다 역동적이고 다각화된 경제 구조와 지역 통합을 주도하려는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통해 빠르게 입지를 넓히고 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교차
러시아의 로사톰은 중앙아시아 원자력 시장의 가장 강력한 주자다. 로사톰은 원전 설계, 건설, 금융 지원, 핵연료 공급, 인력 교육,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을 포괄하는 '원스톱 숍(one-stop-shop)' 모델을 제공한다. 이 모델은 고객 국가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수십 년에 걸친 기술적, 운영적 종속성을 만들어낸다.
중국은 자국의 '화룽 1호(Hualong One)' 원자로를 앞세워 국내외 원자력 시장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하며 러시아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의 원자력 프로젝트는 종종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 구상과 연계된다.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우라늄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중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핵심 목표다.
미국과 유럽연합에게 중앙아시아의 원자력 부상은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산 핵연료 및 농축 서비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최대 우라늄 생산국인 카자흐스탄은 러시아를 대체할 가장 중요한 공급처로 부상했다.
유럽연합은 이미 카자흐스탄과 평화적 원자력 이용 협력 협정을 맺고 있으며, 핵심 원자재에 대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카자흐스탄의 최대 무역 및 투자 파트너다. 미국 역시 카자흐스탄의 원자력 부문과의 협력을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에 대응하고 역내 주권을 지지하며 자국 원자로를 위한 안정적인 우라늄 공급망을 확보하는 전략적 기회로 보고 있다.
유라톰 경험이 주는 교훈
카자흐스탄의 구상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선례인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역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1957년 설립된 유라톰은 공동 연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국제핵융합실험로의 전신 격인 '유럽 공동 토러스(JET)' 프로젝트다. 또한 통일된 안전 기준을 확립하고 강력한 핵물질 안전조치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유라톰은 진정한 의미의 통합된 원자력 산업이나 공동의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다. 프랑스 같이 강력한 국가 원자력 프로그램을 보유한 회원국들은 종종 유럽 공동의 목표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라톰의 경험은 중앙아시아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강력한 국가 주권 의식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간의 뚜렷한 리더십 경쟁 구도를 고려할 때, 카자흐스탄이 제안한 협의회가 유라톰과 같은 깊은 수준의 통합을 이루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세 가지 시나리오
앞으로 중앙아시아의 원자력 거버넌스는 세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첫째, 카자흐스탄이 제안한 협의회가 명실상부한 역내 핵심 포럼으로 자리 잡고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이 참여하는 협력적 모델이다. 이 경우 아스타나의 리더십이 공고해지며 러시아와 기술적으로 연계된 표준이 역내 전반에 확산될 것이다.
둘째, 우즈베키스탄이 독자적인 역량 센터 구상을 계속 추진하여 카자흐스탄 주도 협의회와 병립하는 경쟁 구도가 형성되는 분절적 모델이다. 이는 역내 자원의 중복 투자 등 비효율을 낳을 수 있지만, 소규모 국가들에게는 양쪽 허브 사이에서 선택하고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더 많은 전략적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셋째, 양국의 경쟁 구상이 더 큰 틀의 중국-러시아 경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되는 경쟁적 모델이다.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의 협의회를 적극 지원하는 반면, 중국은 우즈베키스탄의 대안적 구상을 지원할 수 있다. 이 경우 중앙아시아의 원자력 거버넌스는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파편화될 위험이 크다.
주목해야 할 핵심 지표
외교 및 정책 분석가들은 협의회의 헌장과 회원국 구성, 금융 조달 모델, 첫 공동 프로젝트의 성격, 국제원자력기구의 역할 등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의 참여 여부는 협의회의 성격을 규정할 가장 결정적인 첫 번째 지표가 될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제안은 중앙아시아가 더 이상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무대가 아니라,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미래를 설계하려는 능동적 행위자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야심찬 구상의 향방은 향후 수십 년간 유라시아의 에너지와 지정학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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