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유서 깊은 뉴넘 칼리지 포멀홀에서 한복을 입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격식 있는 만찬을 함께하는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단순한 문화 행사를 넘어 영국 학술 전통과 한국 문화가 동등한 위치에서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외교 현장이었다.
주영한국문화원(KCCUK)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한인 학생회(CUKS)가 공동 주최한 '케임브리지 한국의 날: 세미나·한복 포멀 디너'가 11일(현지시간)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케임브리지는 물론 옥스퍼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등 영국 최고 명문대 소속 학생과 연구자들이 참석해 한국의 지적 역량과 문화적 깊이를 체험하는 장이 됐다.
선승혜 주영한국문화원장은 이번 행사를 "한국의 창의성과 케임브리지의 학문적 전통이 만나는 뜻깊은 대화의 장"이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행사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진행된 학술 세미나와 저녁 포멀 디너로 구성돼 지적 교류와 문화 체험을 동시에 제공했다.
학문의 깊이로 한국을 말하다
뉴넘 칼리지 신시아 비어바워 룸에서 열린 세미나에서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소속 한국인 학자 4명이 다양한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케임브리지대 한국학과 김누리 교수는 "한국인과 그들의 외국인 조상(Koreans and Their Foreign Ancestors)"이라는 주제로 민족적 정체성의 역사적 고찰을 제시했다.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방민지 교수는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Inequality in the Labour Market)"을 다뤄 한국이 현대 사회의 보편적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오지연 사서는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한국 컬렉션 만들기: 보물, 전통 그리고 오늘(Building a Korean Collection at the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Treasures, Traditions, and Today)"이라는 발표를 통해 한국학 연구가 세계적 학술 기관에 제도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특히 옥스퍼드대 화학과 김지선 교수의 특별 강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분자(Molecules for a Sustainable Future)"는 한국이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인류의 공동 과제 해결에 기여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줬다. 이러한 주제 구성은 K-팝과 드라마를 넘어 한국의 학문적·기술적 역량을 입체적으로 제시하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전통 속에 스며든 한국 문화
세미나에 이어 진행된 포멀 디너는 이번 행사의 백미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포멀 디너 전통에 한복이라는 한국 전통 복식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킨 것이다. 수백 년 역사의 고딕 양식 홀, 높은 천장과 긴 오크 테이블 사이로 형형색색의 우아한 한복을 입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는 한국 문화를 일방적으로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영국 학술 문화의 핵심 의식 안으로 스며드는 접근법이었다. 참석자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전통 안에서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한국이 낯선 '타자'가 아닌 영국 전통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동료' 문화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약 30명 내외로 제한된 소규모 만찬은 대중적 인기보다는 깊이 있는 대화와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춘 의도적 설계였다. 미래의 글로벌 리더들과 지적인 존중에 기반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장기적 비전이 담긴 선택이었다.
전략적 파트너십의 힘
이번 행사의 성공은 주영한국문화원과 케임브리지 한인 학생회의 효과적인 협력에서 비롯됐다. 주영한국문화원이 국가적 차원의 비전과 자원을 제공하는 전략가 역할을 했다면, 케임브리지 한인 학생회는 대학 공동체 내 신뢰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행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핵심 파트너였다.
케임브리지 한인 학생회는 K-팝 나이트, 포멀 디너, 동문 초청 커리어 강연 등 다채로운 활동을 통해 케임브리지 내에서 이미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한 학생 자치 기구다. 외부 기관이 단독으로는 확보할 수 없는 '진정성'과 '내부자 접근성'을 학생회가 제공함으로써, 행사는 '케임브리지 학생들의 행사'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는 국가 기관이 문화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현지 파트너와 함께 문화를 '공동 창조'하는 대화 방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 행위자가 비국가 행위자와의 협력을 통해 영향력을 배가시키는 '네트워크 외교'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체계적인 문화 외교 전략의 일환
케임브리지 행사는 고립된 이벤트가 아니라 주영한국문화원의 체계적인 국가 전략의 일부다. 주영한국문화원은 케임브리지뿐 아니라 리버풀, 셰필드, 맨체스터, 리즈 등 영국 주요 대학들과 협력해 '한국의 날' 축제 시리즈를 지속 개최하고 있다. 한국 문화 홍보를 런던 중심에서 벗어나 영국 전역의 미래 세대에게 확산시키려는 일관된 전략이다.
특히 이번 행사는 주영한국문화원의 올해 핵심 캠페인인 '한국 문화, 지금!(Korean Culture, Now!)'을 구현하는 대표 사례다. 이 캠페인은 영국 주요 기관과의 협력 강화와 차세대와의 소통을 통해 한국 문화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케임브리지라는 최고 학술 기관과의 협력은 이 목표를 정확히 관통한다.
주목할 점은 케임브리지에서 '한국의 날'이 7월 12일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서도 개최됐다는 사실이다. 7월 행사가 고서, 서예, 공예 등 전통문화 체험에 초점을 맞춰 넓은 대중을 대상으로 했다면, 10월 행사는 학술 세미나와 포멀 디너를 통해 소수의 학계 엘리트를 겨냥한 심층 교류의 장이었다. 두 행사는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케임브리지 내에서 한국 문화의 존재감을 다각도로 구축하는 정교한 전략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미래 리더에 대한 장기 투자
이번 행사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소는 참석 대상의 선정이었다.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UCL 등 영국 최고 명문대 구성원들은 가까운 미래에 각국의 정치, 경제, 학술, 기술 분야를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들이다. 이들에게 학문적 깊이와 문화적 품격을 갖춘 긍정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미래 정책 결정과 국제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적 자본에 대한 장기적 투자다.
학생 시절 형성된 한국에 대한 긍정적이고 깊이 있는 인식은 수십 년에 걸쳐 양국 관계의 무형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옥스퍼드의 화학도가 김지선 교수의 강연을 듣고, 케임브리지의 경제학도가 방민지 교수와 토론하며 얻는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어떤 대규모 홍보 행사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소프트파워를 창출한다.
문화 외교의 새로운 모델 제시
'케임브리지 한국의 날'은 21세기 문화 외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청사진이다. 문화적 융합, 지적 깊이, 전략적 파트너십, 정밀한 대상 설정이라는 네 가지 핵심 요소의 성공적 결합은 이 행사를 현대 공공외교의 교과서적 사례로 만들었다.
행사의 성공 모델은 다른 지역과 국가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적 원칙들을 담고 있다. 첫째,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존중이다. 문화를 단순히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고유 전통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접근은 수용성을 극대화한다. 둘째, 현지 시민사회와의 진정한 파트너십 구축이다. 셋째, '강요'가 아닌 '통합'의 방식이다. 넷째, 대중문화의 인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적·학문적 콘텐츠를 통해 국가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행사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문화 수출국'에서 '문화 파트너'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류가 한국 문화를 알리는 '수출'의 역할을 했다면, 이런 행사는 특정 문화권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새로운 가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십'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선승혜 원장이 제시한 "한국의 창의성과 케임브리지의 학문적 전통이 만나는 뜻깊은 대화의 장"이라는 비전은 행사의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든 단계에서 완벽히 구현됐다. '케임브리지 한국의 날'은 주영한국문화원의 '한국 문화, 지금!' 캠페인의 성공적 이정표일 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중추적 문화·지식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는 대한민국의 미래 외교 전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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