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한국관광공사 자료


오는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연쇄 국빈 방한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본회의 불참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대한민국의 주최국 위상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다수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에이펙 정상회의 본회의가 시작되기 전인 10월 29일경 1박 2일 또는 무박의 짧은 일정으로 방한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의 방문 목적이 에이펙이라는 다자회의 참석이 아닌 시진핑 주석과의 양자회담에 맞춰진 '원포인트 방문'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일정이 현실화될 경우 세 가지 심각한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첫째, 주최국이자 세계 최강대국의 정상이 본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다자주의 외교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로 비칠 수 있으며 에이펙의 권위를 실추시킬 것이다. 둘째, 수년간 공들여 준비한 국제회의가 미·중 정상회담을 위한 배경으로 전락하면서 대한민국의 외교적 리더십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셋째, 트럼프 대통령이 조기 이탈하고 시진핑 주석이 남아 에이펙 정상회의 일정을 모두 소화할 경우, 시 주석은 자연스럽게 회의의 '주빈'으로 부상하게 된다.

올해 에이펙 정상회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 연결, 혁신, 번영(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 Connect, Innovate, Prosper)"이라는 표어 아래 21개 회원국 정상들을 포함해 약 2만여 명의 관료, 기업인, 언론인이 참석하는 대규모 국제 행사다. 정부는 이를 단순한 경제 회의가 아닌 한국의 문화적 매력과 첨단 기술력을 널리 알리는 '복합 경제·문화 행사'로 기획하며 '초격차 케이-에이펙'이라는 브랜드를 내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의장국으로서 인공지능, 공급망 안정, 기후 변화와 같은 미래지향적 글로벌 의제를 선점하고 논의를 주도함으로써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실제로 한국의 제안으로 '디지털·인공지능 장관회의'가 신설되는 등 의장국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노력이 연중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야심 찬 계획은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현실과 충돌하며 '주최국의 딜레마'를 낳고 있다. 국제 사회의 관심은 에이펙의 본래 의제보다는 트럼프와 시진핑의 참석 여부 및 두 정상 간의 회담에 집중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21개국이 참여하는 다자 외교의 지휘자에서 미·중 양자회담의 무대 관리자로 역할이 축소될 위험에 처했다.

한·미 정상회담, 동맹 시험대 오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굳건한 동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산적한 현안들로 인해 큰 도전에 직면할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동차 분야를 중심으로 한 무역 불균형 해소를 강력히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한국산 자동차의 원산지 규정 강화, 미국산 자동차 수입 쿼터 확대 등 구체적인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전기차 및 배터리 기업에 차별적으로 작용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조항의 개정 또는 유예도 핵심 의제다. 정부는 동맹국에 대한 배려와 공급망 협력 차원에서 유연한 조치를 요구하겠지만 미국 우선주의 기조와 맞물려 난항이 예상된다.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도 뜨거운 감자다. 트럼프 행정부의 '거래적 동맹관'에 따라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증액 요구가 있을 것이다. 이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을 넘어 한반도 역외 미군 자산의 정비 지원이나 미국 전략자산 전개 비용까지 포함하는 '작전 지원'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어 협상 과정에서 극심한 진통이 예상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반도체·인공지능 기술 동맹에 한국의 더 깊은 참여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미국의 대중국 수출 통제 및 투자 제한 조치에 한국 기업들이 동참하라는 압력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미국 시장·기술과 중국 시장·생산기지에 동시에 의존하는 한국의 핵심 기업들을 '디커플링 딜레마'에 빠뜨린다.

한·중 정상회담, 11년 만의 국빈 방한

2014년 이후 11년 만에 추진되는 시진핑 주석의 국빈 방한은 양국 관계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실질적 협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디커플링 압박 속에서 양국은 경제 관계의 안정적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다.

특히 한국이 높은 의존도를 보이는 희토류, 핵심 광물, 배터리 소재 등에서 공급망 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조기 경보 시스템' 구축 등 구체적인 협력 방안이 논의될 전망이다. 미·중 갈등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기후 변화 대응, 디지털 경제, 보건·의료 등 새로운 분야에서의 협력을 통해 양국 경제 관계의 동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북한이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심화하는 등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은 북한의 최대 후원국인 중국이 도발을 억제하고 비핵화 대화 복귀를 유도하는 건설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대북 정책은 미·중 관계라는 더 큰 변수에 종속되어 있어 중국의 협력 수준은 제한적일 수 있다.

사드(THAAD) 배치 이후 지속되어 온 비공식적인 한류 콘텐츠 제한 조치인 한한령의 실질적 해제는 이번 회담의 가장 상징적인 성과가 될 수 있다. 이는 양국 국민 감정을 개선하고 관계 정상화를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 될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 갈등 관리가 핵심

경주에서 열릴 미·중 정상회담은 에이펙 행사의 '실질적 본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회담의 목표는 문제 해결보다는 갈등의 수위를 조절하고 양국 관계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한 '위험 관리'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회담에서는 무역 전쟁과 고율 관세 문제, 틱톡을 포함한 중국 기술 기업에 대한 미국의 제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하는 중국의 역할, 그리고 대만 해협의 군사적 긴장 등 양국 관계의 모든 핵심 뇌관이 다뤄질 것이다.

이 회담의 분위기와 결과는 대한민국의 전략적 공간을 직접적으로 규정한다. 양국이 갈등 관리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소통 채널을 유지하기로 합의한다면 한국의 외교적 운신 폭은 넓어질 수 있다. 반면 회담이 상호 비난으로 끝나고 긴장이 더욱 고조된다면 한국이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압박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의전의 역설과 전략적 선택

외교 의전에서 '국빈 방문(State Visit)'은 국가가 외국 정상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의미한다. 대통령 임기 중 원칙적으로 국가별로 단 한 차례만 허용되며 공항 도착 시 예포 21발 발사, 공식 환영식, 문화 공연을 포함한 대통령 주최 만찬, 의회 연설 등 최고 수준의 의전 절차가 포함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모두를 '국빈'으로 초청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안보 동맹과 경제 파트너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정교한 균형 외교의 표현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서울에서 진행되는 국빈 방문 행사가 이번에는 에이펙 개최지인 경주에서 열릴 가능성이 크며, 이는 물리적 제약으로 인해 의전 절차가 다소 '간소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빈 방문'이라는 형식은 최고의 존중과 우의를 의미하지만 그 내용이 다자회의를 경시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기 체류로 채워진다면 형식과 내용의 괴리가 발생한다. 이는 '국빈 방문'이라는 외교적 개념 자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며, 대한민국 정부가 외교적 균형이라는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큰 압박을 받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선례와 현재의 도전

20년 전인 2005년 부산에서 개최된 에이펙 정상회의에서도 조지 더블유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모두 참석하여 다자회의와 함께 양자 정상외교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후진타오 주석은 에이펙을 계기로 한국을 국빈 방문하여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발전에 합의하고 북핵 문제 공조, 경제 협력 강화 등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했다.

이는 올해 한·중 정상회담의 기대치를 높이는 동시에,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된 현재의 미·중 갈등 구도가 이번 회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하게 하는 척도가 된다.

전략적 모호성의 한계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 구도 속에서 특정 사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왔다. 이는 미·중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을 피하고 국익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미·중 갈등이 기술, 가치, 이념을 아우르는 전방위적 패권 경쟁으로 심화하면서 이러한 모호성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번 경주 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은 각자의 편에 더 확실히 서줄 것을 요구하며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을 한계까지 시험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수동적 인식에서 벗어나 양측 모두에게 필요한 핵심 파트너로서의 가치를 지렛대로 삼는 '글로벌 중추 국가' 비전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번 외교전은 그 비전이 실현 가능한 목표인지, 아니면 수사적 이상에 불과한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경주의 유산

경주에서 펼쳐질 일련의 외교 활동의 성패는 단기적인 공동성명이나 언론 보도로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그 진정한 의미는 향후 대한민국의 대미, 대중 관계 설정과 동북아 질서에 미칠 장기적인 영향으로 가늠될 것이다.

이번 정상회의는 대한민국이 미·중 패권 경쟁의 파고를 넘어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입증하고 능동적인 중견국가로서의 역할을 확립하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강대국 정치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의 외교적 자율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선택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는 시대의 서막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경주의 유산은 대한민국이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얼마나 정교하고 담대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는지에 달려있다. 이번 회담의 결과는 향후 수년간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21세기 패권 경쟁 시대에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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