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코피아 ODA 사업 현장 표지판/이재정의원실 제공
대한민국이 연간 6조원이 넘는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지원을 받는 개발도상국 현장에서는 한국의 지원 사업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은 16일 아프리카 우간다와 케냐 현장 시찰 결과를 공개하며 무상원조 통합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우간다 의회 관계자들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사업은 한국 정부 지원으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이나 농촌진흥청 산하 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KOPIA)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현장의 물리적 증거는 더욱 참담했다. 한 KOFIH 사업장에는 출장 직전 급하게 붙인 듯한 태극기 포스터 외에는 국가 표식이 전무했으며, KOPIA 사업장 안내판에서는 '코리아(Korea)'라는 문구나 태극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무상원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약 9천500만 달러(약 1천300억원)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유상원조로 추진된 케냐 과학기술원 건립 사업은 건물과 기자재만 덩그러니 놓인 채 운영 주체 없이 방치된 '유령 캠퍼스' 상태였다. 사업의 기획부터 사후 관리까지 종합적으로 조율할 컨트롤타워의 부재가 낳은 예견된 결과였다.
이 의원은 이러한 문제 제기를 '국제개발협력기본법' 개정안 발의로 이어갔다. 개정안은 외교부와 재외공관이 무상원조 사업을 현장에서 총괄 조정하는 권한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에서 펼치는 ODA 현장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는 우간다의 코피(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현장./이재정의원실 제공
세계 13위 공여국의 민낯... 40개 부처에 흩어진 예산
한국은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 이후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2025년도 ODA 예산은 6조5천억원으로 편성되었으며, 2010년 DAC 가입 이후 14년간 예산이 3.9배 증가했다.
최신 OECD DAC 잠정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ODA 순지출액은 역대 최고치인 39억4천만 달러를 기록해 DAC 32개 회원국 중 13위에 올랐다. 이전 16위에서 크게 도약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양적 성장의 이면에는 심각한 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국민총소득(GNI) 대비 ODA 비율은 0.21%로 한국에게는 역대 최고 수치지만 DAC 평균인 0.3%에 미치지 못하며, 회원국 중 26위에 그치는 수준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분절화(fragmentation)'다. 현재 ODA 사업은 40개 이상의 중앙부처 및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한 언론사 분석에 따르면 ODA 사업 집행기관의 수는 2013년 326개에서 2022년 433개로 급증했다. 2024년 예산안만 보더라도 총 34개 부처 및 기관이 ODA 예산을 배정받았으며,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처럼 1억원에 불과한 소액 예산을 받은 곳도 있었다.
전체 지원액 중 양자원조(31억8천만 달러)가 다자원조(7억6천만 달러)보다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양자원조는 다시 외교부가 주관하고 KOICA를 통해 집행되는 무상원조(약 22억2천만 달러)와, 기획재정부가 주관하고 수출입은행의 EDCF를 통해 집행되는 유상원조(약 9억6천만 달러)로 나뉜다.
반복되는 개혁 좌초... 부처 이기주의의 벽
분절된 ODA 시스템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 속에서 진화해온 결과물이다. 1991년 KOICA 설립 자체가 과거 여러 부처에 산재해 있던 무상원조 사업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은 분절화가 한국 ODA의 태생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유상원조(EDCF)와 무상원조(KOICA) 기능이 처음부터 별개의 기관으로 출범한 것은 과거 일본의 제도를 참고한 것으로, 시작부터 제도적 분리의 씨앗을 잉태한 셈이다.
2010년 '국제개발협력기본법'이 제정되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제개발협력위원회라는 컨트롤타워가 설치되었지만, 진정한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위원회는 강력한 통합 전략을 지휘하기보다는 기존의 이원적 구조를 공식화하고 부처 간의 힘겨루기를 중재하는 협상장 역할에 머물렀다. 2020년 법 개정을 통해 위원회의 통합·조정 기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는 여전하다.
수많은 개혁 시도가 좌초된 배경에는 '부처 이기주의'라는 강력한 관성이 자리잡고 있다. ODA를 외교 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보려는 외교부와 경제 협력의 도구로 간주하는 기획재정부 간의 해묵은 주도권 다툼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 공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상원조 통합조차 실패한 것이 그 사례다. 당시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ODA 사업을 보유한 여러 부처들이 예산과 권한을 외교부/KOICA에 이관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통합, 미국은 분권... 전략적 목표가 먼저다
한국 ODA의 미래를 둘러싼 논쟁은 크게 '통합'과 '분산(전문화)'이라는 두 가지 시각으로 나뉜다.
통합론자들은 전략적 일관성, 효율성과 시너지, 브랜드 강화 및 영향력 극대화, 책임성 확보 등을 근거로 든다. 일본의 자이카(JICA)처럼 단일화된 강력한 원조 기관은 명확하고 인지도 높은 국가 브랜드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반면 분산론자들은 전문성 활용, 유연성과 혁신, 다양한 정책 목표 수용 등을 강조한다. 농업, 보건, 정보통신기술(ICT) 등 특정 분야의 전문성은 단일화된 종합 원조 기관이 따라가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2008년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외무성의 무상원조 기능, 구 JICA의 기술협력, 국제협력은행(JBIC)의 유상차관 포트폴리오를 하나의 포괄적인 기관인 '신(新) JICA'로 통합했다. 개혁의 목표는 무상, 유상, 기술협력이라는 세 가지 원조 수단을 하나의 사업이나 국가 전략 안에서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전략적 일관성과 효율성,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현재 JICA는 정부가 설정한 '질적 성장'과 '인간 안보'라는 명확한 전략적 틀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
반면 미국의 시스템은 50개 이상의 연방 기관이 해외 원조에 관여하는 고도로 분권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국무부, 재무부, 밀레니엄챌린지공사(MCC) 등 여러 기관이 함께 활동한다. 미국 원조 시스템의 일관성은 단일 기관이 아닌, 백악관과 국무부가 주도하는 하향식 전략 방향에서 나온다. 원조는 국가 안보 및 외교 정책 목표에 명백하고 직접적으로 연계되며, 의회의 강력한 감독을 받는다.
일본과 미국의 비교는 '최고의 모델'은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일본은 개발 도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통합을 선택했고, 미국은 광범위한 외교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권화된 구조를 유지한다. 행정 구조는 국가가 ODA를 통해 달성하려는 전략적 목표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점진적 개혁이냐, 전면 통합이냐... 한국의 선택
이재정 의원이 발의한 '국제개발협력기본법' 개정안은 가장 심각한 분절이 일어나는 무상원조 분야를 우선 대상으로 삼아, 기획재정부와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현장 중심의 조정을 강화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점진적인 접근법이다.
그러나 이는 외교부-기재부 갈등의 근원인 유·무상 분리라는 더 큰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 둔다는 한계가 있다. 핵심 문제를 비껴간 부분적인 해결책에 그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다음과 같은 대안적 경로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첫째, 현재의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중복 사업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통일된 국가 ODA 전략을 강력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조정 기능의 실질적 강화'다.
둘째, 일본 모델을 참고한 '단계적 통합'이다. 1단계로 이재정 의원의 제안처럼 모든 무상원조를 단일 기관(KOICA)으로 통합하고, 2단계로 보다 어려운 과제인 유·무상 기능의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다.
셋째, '전략과 기획'은 강력한 조정 기구 아래 중앙집권화하되, '사업 집행'은 전문성을 가진 각 부처가 분산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기능적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이 경우 각 부처는 반드시 통일된 국가 ODA 전략에 부합하는 사업만을 추진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은 ODA의 양적 팽창이라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이재정 의원의 문제 제기로 촉발된 현재의 논쟁은, 그 거대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더 스마트하고, 전략적이며, 영향력 있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필수적인 국가적 성찰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행정 체계를 바꾸는 문제를 넘어,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비전을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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