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자료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대한민국의 기술 외교 전략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재명 대통령은 격화되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서 외교적 중재자 역할과 인공지능(AI) 산업 허브로의 도약이라는 두 가지 성과를 동시에 거뒀다.

지난 11월 1일 채택된 '경주 선언'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기조로 인해 APEC의 전통적 가치였던 '자유무역' 문구가 선언문에서 실종되는 한계가 있었지만, 한국은 'APEC AI 이니셔티브'를 미-중 양국이 모두 참여하는 최초의 정상급 AI 합의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번 이니셔티브의 핵심은 내용보다 형식과 맥락에 있다. AI 기술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양국을 포함한 21개 회원국 모두가 동의한 최초의 정상급 합의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은 'AI 기본사회'라는 포용성과 혁신이라는 개발 가치를 동시에 담아내며, 어느 한쪽도 거부할 수 없는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이재명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 세션에서 "한국은 인류가 혜택을 누릴 AI 기본사회를 실현할 것"이라고 밝히며, '아시아태평양 AI 센터' 설립을 제안했다. 이는 AI 격차 해소와 정책 교류를 목표로 하며, AI 거버넌스 논의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평가된다.

외교적 성과는 곧바로 산업적 성과로 이어졌다. APEC CEO 서밋 참석차 방한한 엔비디아(NVIDIA)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한국 정부 및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네이버 등 4대 그룹과 총 26만 개의 최신 그래픽 처리 장치(GPU)를 공급하는 대규모 협력을 발표했다.

이는 기존 국내 보유량 약 4만 5천~6만 5천 개의 5배에 달하는 규모다. 정부가 당초 2028년까지 확보하려던 목표치 최대 20만 장을 단번에 초과 달성한 것이다. 최신 '블랙웰(Blackwell)' 아키텍처 기반 GPU 가격을 고려하면 약 12조 5천억~14조 원 규모의 투자로, 글로벌 GPU 공급난 속에서 한국에 우선 할당을 약속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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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 CEO는 "한국이 AI 산업 혁명의 심장(heart of the AI industrial revolution)"이라고 선언하며, 한국을 엔비디아의 글로벌 AI 전략을 구현할 생산 기지이자 'AI 인텔리전스 수출국'으로 공식 지정했다.

이번 협력의 구체적 내역을 보면, 정부는 약 5만 개의 GPU를 확보해 주권형 AI 확보에 나선다. 엔비디아의 네모(NeMo™)와 네모트론(Nemotron™) 플랫폼을 활용해 국가 AI 컴퓨팅센터를 구축하고, 국내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와 스타트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 역시 약 5만 개의 GPU를 도입해 차세대 'AI 팹(Fab)'과 로보틱스 혁신에 나선다. 엔비디아의 옴니버스(Omniverse™)를 활용한 반도체 공정 디지털 트윈으로 수율을 향상시키고, 아이작(Isaac Lab™) 플랫폼을 활용한 홈 로봇 개발에도 나선다. 젠슨 황 CEO는 "삼성이 엔비디아의 로봇 칩을 전부 생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SK그룹은 약 5만 개 이상의 GPU로 'AI 팩토리'와 산업용 AI 클라우드를 구축한다.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 연구개발을 가속화하고, 아시아 최초로 제조업과 로보틱스를 위한 산업용 AI 클라우드를 구축할 예정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약 5만 개의 GPU에 약 30억 달러(약 4조 원)를 투자해 '피지컬 AI' 기반 모빌리티 혁명에 도전한다. 차세대 차량에 엔비디아의 중앙 집중형 차량 컴퓨터인 'NVIDIA DRIVE AGX Thor™'를 탑재해 4단계(L4) 자율주행과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개발을 추진한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약 6만 개의 GPU로 한국형 대규모 언어 모델(LLM)인 '하이퍼클로바 X(HyperCLOVA X)'를 고도화한다. 주권형 AI 인프라를 확장하고 조선, 보안 등 산업 특화 AI 모델 개발에 나선다.

젠슨 황 CEO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을 '피지컬 AI'를 구현할 세계 유일의 최적지로 평가했다. 그는 "미국은 소프트웨어는 강하지만 제조업이 약하고, 유럽은 제조업은 강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약한 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역량과 소프트웨어 역량을 동시에 보유한 거의 유일한 국가"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APEC을 통해 'AI 3대 강국'과 'AI 기본사회'라는 국가 비전을 국제사회에 공식 천명했다. 'AI 3대 강국' 비전의 핵심은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파운데이션 모델을 보유하고, 이를 운영할 데이터센터와 GPU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주권형 AI'의 확보다.

'AI 기본사회'는 AI 혁신의 혜택이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이는 과거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정책이었던 기본소득이 AI 혁명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맞춰 진화한 형태로 해석된다.

한편, 이번 협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우선 26만 개의 고성능 GPU가 24시간 가동되면 국가 전력망에 막대한 부담을 줄 수 있어,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SK그룹이 울산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대안으로 액화천연가스(LNG)를 제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또한 하드웨어를 운영하고 가치를 창출할 AI 전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정부가 확보한 5만 개의 GPU를 대학, 연구기관, 스타트업에 지원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나, 하드웨어 공급 속도를 인재 양성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도 남아 있다. 이번 협력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묵인 하에 성사된 것으로 보이나, 미국이 향후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등을 통해 엔비디아 GPU의 사용처를 통제하려 할 경우, 한국은 안보와 시장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2025년 경주 APEC은 대한민국이 지정학적 중재자 역할과 미래 산업 허브라는 두 가지 위상을 동시에 획득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력, 인재, 외교라는 3대 과제를 성공적으로 관리한다면, 대한민국은 AI 산업혁명의 물결에서 '인텔리전스 생산 공장'이자 '지능의 수출국'으로 글로벌 질서를 주도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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