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회담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이것이 평화 협상인가, 아니면 강대국의 거래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머리 위에서 러시아와 직접 협상을 벌이는 구도는 1945년 얄타 회담을 연상케 한다. 당시 미국, 영국,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의 운명을 당사국 없이 결정했고, 그 결과는 반세기에 걸친 냉전 분단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28개항 평화안'의 핵심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 전쟁을 종결한다는 것이다. 이는 침략자에게 전리품을 인정해주는 셈이며, 국제법과 유엔 헌장이 천명한 영토 보전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나토 가입 포기를 헌법에 명시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확실한 안보 보장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조기 선거 요구 역시 그 진의를 의심케 한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적 정통성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토 양보에 난색을 보이는 젤렌스키 정부를 교체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계엄령 하에서 헌법상 불가능한 선거를 100일 내에 실시하라는 요구는 현실적으로 이행 불가능하며, 이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자기결정권이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르막 비서실장의 부패 스캔들과 사임이 회담 직전에 터진 것도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다. 정치적 혼란에 빠진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협상력을 상실한 상태다. 미 국방부 관계자들이 우크라이나 방어선이 이번 겨울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공개적으로 내놓는 것 역시 협상 압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위트코프 특사의 모스크바 방문을 앞둔 시점에서 우크라이나는 극도로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포크로우스크가 함락될 경우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군사적 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러시아가 자국의 운명을 논의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는 주권 국가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다.
유럽의 반응 역시 우려를 자아낸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 '19개항 대안'을 제시하며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의 군사적 지원 없이는 우크라이나를 지탱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가 이들의 목소리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결국 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안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가장 암울한 시나리오는 이번 협상이 선례가 되어 향후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다. 만약 러시아가 침략을 통해 얻은 영토를 국제사회의 묵인 하에 유지하게 된다면, 이는 힘의 논리가 국제법을 압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될 수 있다. 대만 해협, 남중국해, 중동 등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강대국들은 우크라이나 사례를 참고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70% 이상이 전시 선거를 반대하고 있다는 여론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이는 단순히 선거 시기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주권 의식의 발로다. 그러나 전장의 현실과 강대국의 압박 앞에서 이러한 의지가 얼마나 존중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플로리다 회담은 21세기 국제 질서의 본질을 드러낸 거울이다. 민주주의, 주권, 영토 보전이라는 보편적 가치는 강대국의 이해관계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가. '정의로운 평화'가 '현실적인 관리'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이번 12월 초 모스크바 회담의 결과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냉혹한 답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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