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충무로에서 열리는 '안성기 회고전'이 한국 영화의 역사적 뿌리와 문화외교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다. 1980년대 배창호 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구축한 리얼리즘 미학은 오늘날 K-콘텐츠 부흥의 토대가 되었으며, 30년간 유니세프(UNICEF) 친선대사로 활동한 안성기의 행보는 문화예술인의 인도주의적 리더십이 국가 이미지 제고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안성기는 1982년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전과자 주석 역을 맡으며 도시 빈민의 삶을 스크린에 각인시켰다. 영화는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롱숏 기법으로 담아내 당시 고도성장 이면의 그늘을 조명했다. 이어진 1984년 <고래사냥>에서는 거지 행색의 지식인 민우를 연기하며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라는 대사는 1980년대 청춘들의 시대적 슬로건이 되었다.
1985년 작 <깊고 푸른 밤>은 미국 현지 촬영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해체한 문제작이었다. 안성기가 연기한 밀입국자 백호빈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사랑을 가장하는 냉혹한 인물로,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전복시킨 파격적 변신이었다. 이 작품은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을 휩쓸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았고, 준비되지 않은 이민이 빚어낸 비극을 통해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배창호 감독과 안성기의 협업은 단순한 예술적 성취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문화운동이었다. 두 사람은 1980년대 군사독재와 급격한 산업화가 충돌하는 시기에 소외된 이웃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이는 한국 영화가 사회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는 전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리얼리즘의 유산이 없었다면 오늘날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안성기의 활동은 스크린 밖에서도 빛을 발했다. 199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된 이래 30년 넘게 몽골, 소말리아, 케냐, 에티오피아, 말라위 등 분쟁과 기아의 현장을 직접 찾아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2016년 말라위 방문 시에는 영양실조 아동을 직접 돌보며 "어떤 어린이도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2006년에는 광고 모델료 전액을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의 헌신은 2023년 제4회 4·19 민주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이 수상한 이 상을 연예인이 받은 것은 이례적이었다. 심사위원회는 "30년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인류애를 실천하고, 스크린쿼터 사수 등 한국 영화의 주권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점"을 수상 이유로 밝혔다. 안성기는 수상 소감에서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며 평소 지론을 피력했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에서 안성기는 영화인 대책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광화문에서 첫 번째 1인 시위 주자로 나섰고, 이는 장동건, 최민식, 전도연 등 톱스타들의 릴레이 시위로 이어졌다. 칸 국제영화제 현장에서도 시위를 벌이며 한국 영화인들의 결속력을 세계에 알렸다. 당시 정부가 영화계를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자 평소 온화한 그는 "정부의 소통 방식이 촌스럽고 비민주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스크린쿼터는 결국 146일에서 73일로 축소됐지만, 이 투쟁은 한국 영화계가 내부적으로 단결하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에게 '우리 영화를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 이 운동은 이후 <실미도>, <괴물> 등을 통해 천만 관객 시대를 여는 심리적 토대를 구축했다는 분석이다.
한편 11월 28일 서울 충무로에 개관한 '서울영화센터'를 둘러싼 논란은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2010년부터 영화인들이 요구해 온 '서울시네마테크'는 고전 영화와 독립·예술 영화를 수집, 보존, 상영하는 공공 기관으로 계획됐다. 그러나 서울시는 지난해 영화계와의 협의 없이 명칭을 '서울영화센터'로 변경하고 기능을 '영상산업의 거점'으로 재정의했다.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등 한국 대표 감독들은 성명을 내고 "원래의 건립 취지가 훼손됐다"며 서울시가 원안을 복구하지 않을 경우 운영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설 또한 리클라이너 좌석 설치로 객석 수가 줄어들고, 35밀리미터 필름 영사기 운용이 어려운 협소한 영사실 등 시네마테크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안성기 회고전이 영화인들이 보이콧을 선언한 장소에서 열리는 상황은 역설적이다. 평생 영화의 다양성과 예술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온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문화 행정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공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충무로를 다시 영화의 심장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영화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시설은 형식적 외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서울영화센터 논란은 문화를 단순히 돈을 버는 산업이 아니라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1980년대 배창호의 리얼리즘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사회 비판적 걸작들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네마테크와 같은 아카이빙 시설은 산업 논리가 아닌 공공재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화외교 전문가들은 안성기와 배창호가 보여준 예술적 성취와 사회적 행보가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를 구축하는 핵심 자산임을 강조한다. 안성기는 정치인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했으며, 유니세프 활동을 통해 한국이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라 지구촌의 아픔을 공유하는 따뜻한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줬다는 평가다.
2022년 혈액암 투병 사실을 공개한 안성기는 이듬해 "건강을 90퍼센트 회복했다"며 연기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가발 대신 붓기가 남은 얼굴과 짧은 머리로 공식 석상에 등장하며 병마와 싸우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 그의 태도는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안성기 회고전은 단순한 추억 여행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문화적 자존심'을 되묻는 질문이다.
#안성기 #배창호 #문화외교 #리얼리즘영화 #서울영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