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파독(派獨) 간호사들이 국가 재건을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면, 2020년대 한국 간호사들은 생존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행을 택하고 있다. 최근 한국 간호사들의 해외 진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간호사 수출대국'이라는 화려한 수사 이면에 감춰진 국내 의료 현장의 구조적 모순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간호사국가시험원(NCSBN)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미국 간호사 면허시험(NCLEX-RN) 응시자 수는 2020년 198명에서 2023년 약 2,600명으로 3년 만에 13배 이상 급증했다. 한국에는 시험 센터가 없어 응시자들은 일본, 대만, 홍콩 등지로 원정을 가야 하는데도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해외 취업이 아닌 '탈출'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가 새로운 목적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사우디 국립병원 간호사의 기본 월급은 약 500만~600만 원 선으로, 소득세가 없는 데다 약 70평 규모의 컴파운드(Compound) 숙소가 무료로 제공된다. 연간 50~60일의 유급 휴가와 한국 왕복 항공권도 지원된다. 더욱이 많은 간호사들이 사우디를 미국 등 영미권 진출을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하고 있다. 사우디 병원 대부분이 미국 JCI 인증을 받아 미국식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경력이 추후 미국 병원 취업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반면 국내 간호 현장은 'OECD 최하위' 수준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신음하고 있다.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한국 상급종합병원 간호사 1명이 담당하는 환자 수는 12~16명, 일반 병동이나 중소병원은 20~40명에 달한다. 이는 미국(1:5), 일본(1:7) 등과 비교해 4~8배 높은 수치다. 미국 등록 간호사의 2024년 기준 연봉 중간값은 93,600달러(약 1억 2,500만 원)로, 한국 상급종합병원 초임 4,000만~5,000만 원의 2~3배에 달한다.
정부는 지난 10여 년간 간호대학 입학 정원을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최근 5년 동안 신규 간호 인력 배출은 32% 증가해 매년 약 2만 8,000명 이상이 배출되고 있다. 그러나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간호사 면허 소지자 중 실제 활동 비율은 약 50%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머지 절반은 열악한 처우를 견디다 못해 병원을 떠났다.
더욱 기이한 현상은 '웨이팅게일(Waitingale)'이다. 서울경제 보도에 따르면, 대형 병원들이 높은 사직률을 고려해 필요 인원의 2~3배수를 미리 채용해놓고 결원이 생길 때마다 순차적으로 발령을 내면서, 신규 간호사들이 수개월에서 1년 넘게 대기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메디게이트뉴스가 보도한 설문조사 결과, 간호대학생 10명 중 9명이 "간호대 입학 정원 감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현장에서는 '태움'이라 불리는 직장 내 괴롭힘 문화도 심각하다. 인력 부족으로 선배 간호사들이 신규 교육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규 간호사의 실수가 곧 선배의 업무 가중으로 이어지면서 교육이 폭언으로 변질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 명확화와 처우 개선을 위한 '간호법' 제정을 추진해왔으나, 의사 단체 등의 반대와 정치적 이해관계로 번번이 좌절됐다. 메디칼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올해 간호정책 선포식에서 간호사들이 "진짜 간호정책"을 요구하며 절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1960년대 파독 간호사들이 송금한 외화는 당시 한국 연간 총수출액의 1.6~1.9%에 달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 돈은 고속도로를 닦고 공장을 짓는 종잣돈이 되었다. 당시의 간호사 수출은 정부가 주도하고 온 국민이 응원한 '애국적 결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간호사 유출은 국가가 방치하고 개인이 주도하는 '각자도생'의 결과다. 간호사 1명을 숙련된 인력으로 키우는 데는 최소 6~7년의 시간과 비용이 드는데, 한국은 이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고 그 과실은 외국 병원이 누리는 셈이다. 메디파나 보도에 따르면, 지역 의료 붕괴로 인한 환자 수도권 유출 비용만 연간 4조 6,000억 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법적 강제력을 갖춘 간호사 1인당 환자 수 제한, 간호법 제정, 수가 체계 개편 등 근본적인 시스템 개선 없이는 인력 유출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처우 개선 없는 정원 증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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