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페루가 주력전차(MBT) 및 장갑차 총 195대 규모의 대형 방산 수출 계약을 체결하며, 한국형 무기체계가 중남미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번 계약은 단순 무기 판매를 넘어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을 포함한 포괄적 산업 협력 모델로, 남미 방산 지형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현대로템과 페루 육군 조병창(Fábrica de Armas y Municiones del Ejército, FAME S.A.C.)은 9일(현지시간) 페루 리마 육군본부에서 '전차·장갑차 총괄합의서(General Agreement)'를 체결했다. 이번 합의에는 K2 '흑표' 주력전차 54대와 K808 '백호' 차륜형장갑차 141대 등 총 195대의 지상 기동장비 도입 내용이 담겼으며, 계약 규모는 약 20억 달러(한화 약 2조9천억원)로 추산된다.
페루 육군은 1970년대 도입한 소련제 T-55 전차를 50년간 운용해왔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제재로 부품 수급과 유지보수 지원이 중단되면서 전력 공백에 직면했다. 이에 페루 국방부는 기존 안보 공급망을 전면 재검토하고 새로운 파트너 모색에 나섰다.
이번 사업에서 중국 노린코(NORINCO)는 MBT-3000(VT-4) 전차와 VN-1 장갑차를 제안하며 창카이(Chancay) 메가포트 건설 등 경제적 레버리지를 활용했다. 그러나 페루 군 당국과 의회는 중국산 무기체계의 신뢰성 문제와 핵심 안보 자산의 중국 종속 우려를 제기했으며, 최종적으로 나토(NATO) 표준 호환성과 파격적 기술 이전 조건을 제시한 한국을 선택했다.
페루 육군 군수사령부(CALO)의 호르헤 아레발로 칼리노스키(Jorge Arévalo Calinowski) 장군은 15년 장기 계획을 발표하며, 2026년부터 2028년까지 한국 생산 완제품 직도입으로 K2 전차 46~54대와 K808 장갑차 99대를 우선 도입해 초기 운용 능력을 확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2029년부터 2040년까지 페루 리마 외곽 루리간초-초시카(Lurigancho-Chosica)에 위치한 FAME S.A.C. 공장에서 면허 생산을 통해 K2 전차 104대와 K808 장갑차 181대를 추가 생산할 계획이다.
K2 전차는 1,500마력 디젤 엔진과 암 내장형 유기압 현수장치(ISU)를 탑재해 페루의 안데스 산악 지형과 해안 사막 환경에 적합한 기동성을 갖췄다. 특히 차체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ISU는 급경사면에서 주포의 고각과 부각을 확보해 헐다운(Hull-down) 사격을 가능케 한다. K808 장갑차는 최고 속도 100km/h의 전략적 기동성과 런플랫(Run-flat) 타이어, 공기압 조절장치(CTIS), 수상 주행 능력을 갖춰 페루 내륙과 아마존 유역 작전에 효과적이다.
이번 계약은 STX와 FAME S.A.C.의 민관 협력 모델로 추진된다. 현대로템은 체계 종합과 핵심 기술 제공, 생산 설비 엔지니어링을 담당하고, STX는 계약 이행 관리와 물류, 절충교역 프로그램을 조율한다. FAME S.A.C.는 현지 조립 공장 부지를 제공하고 인력을 운용하며, 남미 주변국으로의 유지보수 허브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이번 협상은 치밀한 외교적 노력의 결실로 평가된다. 지난 5월 현대로템-STX 컨소시엄이 FAME S.A.C.의 차륜형 장갑차 도입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11월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지상장비 협력 총괄합의서'를 체결했다.
페루의 K2 전차 도입은 남미 기갑 전력 균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오랫동안 레오파드 2A4CHL을 보유하며 남미 최강 기갑 전력을 자랑해 온 칠레는 K2 전차의 긴 유효 사거리, 능동방어체계(APS) 확장성, 최신 사통 장치로 인해 기존 전차 개량이나 신규 도입 압박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력전차 교체 사업을 추진 중인 브라질과 내부 반군 대응을 위해 차륜형 장갑차를 운용해 온 콜롬비아도 페루의 성공 사례를 주목하고 있다. 페루에 부품 및 정비 거점이 마련되면 브라질은 인접 국가에서 군수 지원을 일부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며, 이는 K2 전차의 남미 시장 확대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한국 방위산업은 이번 계약을 통해 유럽을 넘어 중남미 시장이라는 새로운 교두보를 확보했다. 페루는 FAME S.A.C.를 중심으로 남미 내 한국 방산의 전진 기지로 탈바꿈하게 되며, 이는 폴란드가 유럽 내 K-방산 허브가 된 것과 유사한 전략으로 평가된다. 2026년 본계약 체결 시 구체적인 연도별 납품 스케줄과 대금 지불 조건이 확정될 예정이다.
#K2전차 #페루방산수출 #현대로템 #남미방산시장 #한국방위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