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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Dulles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며 던진 첫 마디는 한국 통상 외교의 현주소를 압축했다. "쿠팡 문제는 통상이나 외교 이슈와 구분해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발언은 3,3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 사태가 한미 통상 마찰의 뇌관이 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여 본부장의 이번 방미는 복합 위기 한가운데서 이뤄졌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4일경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Reciprocal Tariff) 정책에 대한 판결을 앞두고 있다. 한국은 일본이 확보한 자동차 관세 15% 인하 혜택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 막판 협상 중이다. 여기에 한국 국회가 추진 중인 온라인 플랫폼 독점 규제법은 미국 재계의 강력한 반발을 사고 있다.

쿠팡 사태의 본질은 보안 실패다. 2025년 12월 발생한 이번 유출 사고는 퇴사한 중국 국적 개발자가 내부 보안 키를 무단 반출해 해외에서 쿠팡 시스템에 접속한 인사이더 리스크 사례다. 쿠팡은 정부의 정보보호 관리체계 인증을 받았음에도 인증 이후에만 4차례의 대규모 정보 유출을 일으켰다. 여 본부장은 "본질적으로 쿠팡에서의 대규모 정보 유출과 그 이후 대처가 미흡한 부분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쿠팡의 법적 지위가 복잡하다는 점이다. 쿠팡은 한국에서 사업하지만 모회사는 미국 델라웨어주에 등록된 기업이고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다. 미 상공회의소 찰스 프리먼(Charles Freeman) 부회장은 한국의 플랫폼 규제가 "중국 기업은 제외하면서 특정 미국 기업만을 겨냥한다"며 공개 반대했다. 쿠팡 워싱턴 사무소에서 정책을 총괄했던 알렉스 웡(Alex Wong)을 비롯한 트럼프 행정부 측근들도 규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 정부는 온라인 플랫폼 독점 규제법이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있다. 이 법안은 시장 지배적 사업자를 사전 지정하고 자사 우대, 끼어팔기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 본부장은 방미 기간 미 의회와 싱크탱크를 대상으로 법안 취지를 설명하는 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통상 현안도 만만치 않다. 미국은 일본산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기로 합의했다. 한국도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15% 관세율에 예비 합의했지만 세부 조율이 지연되고 있다. 여 본부장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며 미 무역대표부 제이미슨 그리어(Jamieson Greer) 대표와 치열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미 연방대법원의 상호관세 판결도 변수다.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 승인 없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을 발동해 관세를 부과한 것이 합법인지를 다투는 소송의 판결이 임박했다. 대법원이 행정부 손을 들어줄 경우 미국의 관세 압박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패소하더라도 트럼프 측은 무역확장법 232조 등 다른 수단으로 관세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여 본부장의 '분리 대응' 전략이 협상용 수사로는 유효하지만 실제로는 디지털 규제와 관세 문제가 연계된 패키지 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통상 협상에서 서로 다른 이슈를 연계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 개최가 연기된 것도 한국의 디지털 규제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 본부장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합리적인 협상 결과를 도출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대내적으로 경제 민주화 기치 아래 플랫폼 규제를 밀어붙이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수출 주도 경제를 위해 미국의 관세 장벽을 낮춰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향후 수년간 한미 경제 동맹의 성격을 규정할 이번 협상의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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