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사태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거세지는 가운데, 미국과 이스라엘의 강한 반발에 맞서 각국의 외교적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한미동맹, 이스라엘과의 관계, 아랍권과의 실리 등 다층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신중한 외교적 선택의 기로에 섰다.
'국가 인정' 카드 꺼내 든 유럽, 고립되는 미국
최근 국제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유럽의 태도 전환에서 시작됐다. 스페인, 아일랜드, 노르웨이가 팔레스타인을 공식 국가로 인정한 것을 필두로, 주요 7개국(G7) 내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G7 국가 중 최초로 오는 9월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영국과 캐나다 역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조치"가 없다면 국가 인정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은 가자지구의 인도주의적 참사에 대한 국제적 압박과 함께, 기존의 평화 협상 방식이 실패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유럽 주요국들은 팔레스타인을 먼저 국가로 인정함으로써 협상력을 높여주고, 이를 통해 교착 상태에 빠진 '두 국가 해법'을 되살리는 촉매제로 삼으려는 전략적 전환을 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이스라엘과의 굳건한 동맹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반드시 양측의 직접 협상을 통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4월 18일,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의 정회원국 가입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제적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테러에 대한 보상"이자 "국가적 자살행위"로 규정하는 이스라엘의 강경한 입장과 궤를 같이하지만, 가장 가까운 유럽 동맹국들 사이에서조차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각 딜레마' 속 한국의 정교한 외교
대한민국은 이 복잡한 구도 속에서 정교한 균형 외교를 펼치고 있다.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팔레스타인 국민의 유일 합법 대표"로 인정하며 라말라에 대표사무소를 운영하고 인도적 지원을 계속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세 가지 핵심 이익이 얽힌 '삼각 딜레마'의 결과물이다. 첫째, 국가 안보의 초석인 '한미동맹'을 거스를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이다. 둘째, 방산, 첨단기술,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얽힌 '이스라엘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이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수입과 건설, 방산 등 거대 시장인 '아랍 세계와의 경제 및 에너지 안보'다. 이 세 가지 축 사이에서 마찰을 최소화하는 선택이 바로 현재의 '국가 불인정, 그러나 교류와 지원' 정책인 셈이다.
이러한 한국의 입장은 지난 4월 18일 안보리 표결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한국은 팔레스타인의 유엔 정회원 가입 결의안에 '찬성' 표를 던졌다. 이는 2012년 팔레스타인의 유엔 옵서버 국가 지위 격상 당시 '기권'했던 것에서 나아간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의 보편적 합의에 동참하면서도, 표결 직후 "이번 투표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어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외교적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하는 정교함을 보였다.
상징과 현실의 간극… 전망은
앞으로 서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의 흐름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합법성을 강화하는 상징적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국경과 안보를 통제하는 이스라엘의 협력과 미국의 지지가 없다면, 영토 내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독립 국가로 나아가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결국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 팔레스타인 내부의 정치적 분열 등 난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두 국가 해법'은 여전히 유일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비록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여도 이를 대체할 국제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 변수는 미국의 정책 변화 여부다. 미국의 입장 전환이 없는 한, 국제사회는 한동안 '널리 인정받지만 주권은 없는 국가'라는 역설적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국 역시 현재의 신중한 균형점을 유지하며, 국제 규범을 존중하되 국익을 극대화하는 외교적 노력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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