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휴전 합의 후 100일 이내 총선 및 대선 실시를 요구하며 강도 높은 외교 압박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11월 30일 미국 플로리다주 할란데일 비치(Hallandale Beach)에서 열린 미-우크라이나 고위급 회담에서 선거 일정이 핵심 의제로 다뤄졌으나, 영토 양보와 안보 보장 문제에서는 양측이 뚜렷한 입장차를 드러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국무장관과 스티브 위트코프(Steve Witkoff) 대통령 특사,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가 이끈 미국 대표단은 이날 루스템 우메로프(Rustem Umerov)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서기를 수석 대표로 하는 우크라이나 측과 회담을 가졌다. 이번 회담은 11월 23일 제네바 다자협의에 이어 진행된 것으로, 위트코프 특사의 모스크바 방문을 앞두고 양측 입장을 조율하기 위한 자리였다.
회담에서 미국 측은 트럼프 행정부가 구상 중인 '28개항 평화안'의 핵심 조항인 조기 선거 실시를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계획은 휴전 합의 후 100일 이내에 우크라이나에서 선거를 치르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y) 대통령의 임기가 지난해 5월, 의회 임기가 8월에 각각 종료됐다는 점을 들어 정부의 법적 정통성 재확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측은 계엄령 하에서의 선거 실시가 헌법 제83조에 따라 불가능하며, 수백만 명의 피란민과 전선의 군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거를 강행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반박했다. 우크라이나 선거관리위원회는 최신 유권자 명부 작성과 투표 시스템 구축에만 최소 6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편 평화 협정의 본질적 쟁점인 영토 문제와 안보 보장에서는 양측이 평행선을 달렸다. 미국과 러시아가 초안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 평화안은 현재 러시아가 점령 중인 크림반도, 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사실상 통제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표단은 이를 강력히 반발했으나, 전황 악화로 협상력이 약화된 상태다.
안보 보장 문제에서도 입장 차이가 컸다. 우크라이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대체할 수 있는 서방의 확실하고 구속력 있는 안전 보장을 요구하고 있으나, 미국 측 제안은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와 나토 가입 불가 헌법 명시를 담고 있어 우크라이나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파악된다. 루비오 장관은 회담 후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으나,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이번 회담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실질적 2인자였던 안드리 예르막(Andriy Yermak) 비서실장이 부패 스캔들로 11월 28일 사임한 직후 열린 첫 고위급 회담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우크라이나 국가반부패국(NABU)은 '마이다스 작전(Operation Midas)'으로 명명된 수사에서 국영 원자력 기업 에네르고아톰(Energoatom) 관련 1억 달러 규모의 횡령 혐의를 포착하고 예르막의 자택과 집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예르막은 개전 이후 대미 협상과 평화안 조율을 전담해온 인물로, 그의 낙마는 미국과의 협상 채널에 일시적 혼선을 초래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급히 우메로프를 수석 대표로 임명했으나, 우메로프는 예르막만큼 대통령과 긴밀한 개인적 유대감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젤렌스키의 지지율은 전쟁 초기 84%에서 현재 67%로 하락했으며, 정부 전체 신뢰도는 46%에 머물고 있다.
외교적 압박이 거세지는 배경에는 우크라이나군의 급격한 전황 악화가 자리잡고 있다. 11월 말 기준 러시아군은 동부 전선의 핵심 물류 허브인 포크로우스크(Pokrovsk) 외곽에 진입해 도시를 반포위 상태로 몰아넣었다. 포크로우스크 남쪽의 쿠라호베(Kurakhove)는 12월 초 사실상 러시아군 수중에 넘어간 것으로 파악되며, 북동부 쿠피안스크(Kupiansk)에서도 러시아군이 시가전을 전개하고 있다.
위트코프 특사는 12월 1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지을 예정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Dmitry Peskov) 크렘린 대변인은 위트코프와의 만남을 확인하면서도 "분쟁의 근원적 해결", 즉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중립화와 탈군사화를 요구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주요국은 미국의 독단적인 평화안 추진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영국 총리와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독일 총리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과 주권을 무시한 평화안은 유럽 안보 전체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 지도자들은 미국의 '28개항 평화안'에 대항해 '19개항 대안'을 마련하고, 나토 가입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유럽군 파병이나 상호방위조약 수준의 안보 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70% 이상은 종전 전 선거 실시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선거가 러시아의 개입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우려와 정부가 전쟁 수행에 집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젤렌스키 정부의 민주적 정통성을 갱신하고 평화 협정을 비준할 수 있는 새로운 의회 구성을 위해 선거를 강력히 밀어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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