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신문


2025년은 대한민국 외교사에 '대전환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 심화와 보호무역주의 부활로 국제질서가 파편화되는 가운데, 6월 4일 취임한 이재명 정부는 이념적 경직성을 탈피하고 철저한 국익 중심의 '신실용주의'를 외교 기조로 천명했다.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은 동맹 관계의 전면적 재정립을 요구했고,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과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주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 의장국 수임은 한국이 '글로벌 중추국가'를 넘어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가교국가'로 발돋움하는 시험무대가 됐다.

특히 지난 1년간 한국 외교는 '실리'와 '명분'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반도체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41.8% 급감하는 등 경제 위기 상황에서 외교는 더 이상 의전의 영역이 아니라 경제 영토를 방어하고 확장하는 최전선이 됐다. 동시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 인본주의 외교, 민주주의 정상회의 참여를 통한 가치외교의 심화는 한국이 단순한 경제 강국을 넘어 문화와 철학을 공유하는 성숙한 민주국가임을 입증했다.

◆ 한미동맹 진화: 안보에서 산업통합 동맹으로

한미 관계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안보 개념이 산업적 상호 의존성으로 확장됐다는 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는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이라는 도전이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역이용해 미국의 약해진 산업 기반을 보완하는 '윈-윈' 전략을 구사했다. 그 중심에 조선업과 유지·보수·정비(MRO) 협력이 있었다.

미국은 존스법(Jones Act) 등 규제로 자국 내 조선소 역량이 급격히 쇠퇴해 해군 함정의 적기 수리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 해군의 전력 투사 능력에 공백을 초래하는 안보 리스크였다.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은 이 틈새를 파고들어 미 해군 보급체계사령부와 함정정비협약(MSRA)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특히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 진행된 미 해군 군수지원함 '윌리 쉬라(Wally Schirra)'호의 MRO 프로젝트는 통상적인 미 본토 수리보다 획기적으로 단축된 공기와 비용 절감으로 트럼프 행정부에 한국이 단순한 안보 수혜자가 아니라 미국 안보의 '산업적 파트너'임을 각인시켰다. 미 해군의 연간 MRO 지출 규모가 약 60억~74억 달러(약 8조~10조 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한국 조선업계에 막대한 경제적 실리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한반도 유사시 미 증원 전력의 안정적 전개를 보장하는 안보적 명분까지 확보했다.

8월 25일 백악관에서 개최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은 이러한 산업 협력을 바탕으로 통상 갈등을 봉합하는 분수령이 됐다. 당시 한국 경제는 대미 수출 감소와 글로벌 수요 둔화로 12월 1일부터 20일 기준 수출이 43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6.8% 감소하는 등 위기에 직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보편적 관세 부과 위협은 한국 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양국 정상은 회담에서 한국산 상품에 대해 한미 FTA나 미국의 최혜국(MFN) 관세율 중 적용 가능한 세율, 또는 15% 중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한국 기업들이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총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 분야 투자와 2,0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약속하고 미국 내 낙후된 조선소와 제조 시설에 투자해 '미국 제조업의 부활'을 돕겠다는 명분을 제시한 결과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전 방명록에 "아! 위대한 정상회담의 아름다운 시작"이라고 적고, 회담 후 이 대통령에게 "당신은 위대한 사람이고 위대한 지도자다. 한국은 당신과 함께 더 높은 곳에서 놀라운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나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다"는 메시지를 직접 써서 전달한 것은 이러한 거래가 양국 모두에게 정치적 승리였음을 시사한다.

안보 현대화 차원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10월 29일 경주 APEC 정상회의 계기 열린 두 번째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의 핵잠 건조 등 여건 변화에 따라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제기했다. 탈냉전 시대의 종식과 북러 밀착에 따른 안보 지형 변화를 근거로 미국의 확장억제에만 의존하는 수동적 방어를 넘어 독자적 수중 작전 능력 확보 필요성을 설명한 것이다. 비록 즉각적인 기술 이전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핵추진잠수함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데 공감을 표하고 후속 협의를 제안해 향후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 이는 민주당 정부의 '자주 국방' 의지와 공화당 행정부의 '동맹국 책임 분담'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로 해석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또한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3.5%로 증액하겠다는 계획을 공유했으며, 2030년까지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에 250억 달러를 지출하고 주한미군을 위해 330억 달러 상당의 포괄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양 정상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위한 동맹 차원의 협력을 지속하기로 합의했다.

◆ 한일 관계: 국교 정상화 60주년과 '미완의 화해'

202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라는 역사적 해였다. 양국 정부와 민간은 경제, 문화, 학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총 500건 이상의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우호 분위기를 조성했다. 4월 24일 서울 경희궁에서 시작해 부산, 오사카, 요코하마를 거쳐 9월 도쿄에서 막을 내린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는 양국 국민이 물리적으로 함께 평화의 역사를 되새긴 상징적 사건이었다. 특히 서울에서 도쿄까지 옛 조선통신사의 길을 자전거로 종주한 '자전거 신조선통신사' 행사는 양국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

제도적으로는 6월부터 시행된 '한일 양국 전용 입국심사대' 운영이 돋보였다. 이는 연간 1천만 명에 육박하는 인적 교류의 편의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조치로, 정치적 갈등과 무관하게 민간 교류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통합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었다. 6월 1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영상 축사를 통해 "한일관계는 지난 60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고, 이제는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 더 안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 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때"라고 밝혔다.

11월 경주에서 발표된 한일 정상 공동선언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이후 27년 만에 도출된 포괄적 합의 문건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졌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며 과거사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선언은 '명분' 측면에서 한계를 보였다. 강제동원 문제나 식민지 불법성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이고 새로운 사죄가 빠진 채 '미래지향적 협력'이라는 모호한 수사에 그쳤기 때문이다. 10월 21일 취임한 이시바 내각의 취약한 당내 기반과 낮은 지지율은 과감한 과거사 정리를 불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한계였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역사적 책임에 대한 분명한 인정 없이 경제 협력만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화해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실리'의 관점에서 이번 선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양국은 수소 에너지 공급망 구축, 스타트업 생태계 연동, 제3국(중동, 동남아) 공동 진출 등 실질적 경제 협력의 틀을 제도화했다. 4월 15일 도쿄에서 열린 '2025 한일 파트너십 플러스 위크'에서는 반도체 소재, 물류 등 일본 기업 6개사가 총 4,400만 달러(약 640억 원) 규모의 대한국 투자를 결정했다. 이는 반도체 소재 등 공급망 안보를 위해 일본과의 협력이 필수적인 한국의 현실적 선택이었다.

인본주의 관점에서 한일 관계의 가장 의미 있는 진전은 민간 교류의 폭발적 증가였다. 양국 간 인적 교류는 하루 평균 1년 치를 넘는 규모로 증가했으며, 문화·경제 교류는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정부 간 갈등과 별개로 양국 국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 한중 관계: '민생 외교'를 통한 관계 복원

2025년 대중국 외교는 '가치'의 충돌을 우회하고 '이익'의 교집합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11월 1일 경주 APEC 계기 열린 한중 정상회담은 양국 관계의 "전면적 복원"을 선언하며 냉각기를 끝냈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대만 문제, 북핵 등)은 관리 모드로 전환하고,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민생 의제'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

가장 극적인 성과는 중국의 전격적인 '한국인 비자 면제 조치'였다. 이는 중국이 한국 민심을 되돌리고 한미일 3각 협력의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 던진 승부수였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관광 및 비즈니스 활성화를 위한 큰 호재였다. 또한 보이스피싱, 마약 등 초국적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수사체계 구축 합의는 양국 국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인본주의 외교'의 구체적 실천 사례로 평가받는다.

경제 안보 측면에서 한중은 '공급망 핫라인'을 가동하기로 했다. 요소수 사태와 같은 원자재 대란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은 한국 기업에 대한 핵심 광물(갈륨, 게르마늄 등) 수출 통제를 완화하고, 한국은 중국의 첨단 기술 배제 움직임 속에서도 '비정치적 영역'에서의 기술 교류를 지속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 사이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적 모호성'이자 '실용적 명확성'이었다.

그러나 대중국 수출은 여전히 부진했다. 12월 1일부터 20일까지 대중국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6.5% 감소했다. 중국 내수 회복 지연과 자급률 상승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경제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며, 장기적 관점에서 중국 시장 다변화와 새로운 협력 모델 구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 APEC 경주: 천년 고도에서 미래를 설계하다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는 한국 외교의 문화적 품격을 전 세계에 과시한 무대였다. '연결, 혁신, 번영'을 주제로 열린 이번 회의에는 미·중·일 정상을 포함한 21개 회원국 대표단이 집결했다. 2005년 부산 APEC 이후 20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된 이번 회의는 6월 4일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에게 신정부 첫 다자 정상회의이자 국제 무대 데뷔였다.

경주의 선택은 탁월했다.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의 역사적 자산은 단순한 회의 장소를 넘어 한국이 오랜 기간 개방과 통상을 통해 번영해온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월정교 위에서 펼쳐진 한복 패션쇼와 대릉원을 수놓은 미디어아트는 각국 정상과 배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K-컬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신라 금관 특별전은 신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금관 여섯 점을 한자리에 전시해 한국 고대 문명의 정수를 선보였다.

의장국인 한국은 보호무역주의의 파고 속에서도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경주 선언' 채택을 주도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은 'AI 포용성 이니셔티브(Gyeongju Initiative for AI Inclusiveness)'를 제안해 디지털 격차 해소와 AI 기술의 윤리적 사용을 위한 국제 규범 마련에 앞장섰다. 이는 한국이 하드웨어(반도체) 강국을 넘어 소프트웨어(규범) 선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인구구조 변화 대응'도 APEC 정상 차원에서 처음 논의됐다. 한국은 고령사회 대응 시스템, 인적자원 순환 강화, 의료 및 기술혁신 촉진 등 정책 협력안을 제시했다. 이는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직면한 한국의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부대 행사로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열린 APEC CEO 서밋에는 1,700여 명의 글로벌 기업인이 참석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특별 기조연설을 진행했으며, 방탄소년단의 멤버 RM도 연설을 진행해 화제를 모았다. 특히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빅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대거 참석해 한국 스타트업과의 협력을 모색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경주 회의 기간 동안 체결된 투자 양해각서(MOU)와 비즈니스 상담은 약 12억 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 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추산되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APEC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24년 12월 비상계엄 사태로 정부 활동이 정지되면서 회의 시설과 숙소 준비가 지연됐고, 일각에서는 제2의 잼버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그러나 2025년 초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이 총력을 기울인 결과 성공적으로 회의를 마쳤다. 이는 한국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복원력을 시현한 성숙한 민주 국가임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 한반도 안보: 북러 밀착과 위기 관리

2025년 북한 정세는 '단절'과 '결속'으로 요약된다. 북한은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맞아 내부 결속을 다지며 남북 관계를 '적대적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화했다. 평화 통일의 담론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핵 무력 고도화와 대남 위협이 채웠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북러 밀착의 심화였다. 2024년 체결된 '북러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조약'에 따라 북한군 파병과 러시아의 첨단 군사 기술 이전이 현실화되면서 한반도 안보 방정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외교 채널을 완전히 닫지 않는 '차별적 관여(Compartmentalized Engagement)' 전략을 구사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과 관련해서는 서방과 보조를 맞추면서도, 한러 관계의 파탄을 막기 위해 민간 교류와 비군사적 물자 교역의 끈은 놓지 않았다.

8월 25일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피스메이커(Peacemaker)로서의 역할이 정말 눈에 띄는 것 같다"며 한반도 평화에 대한 트럼프의 역할을 치켜세웠다. 이 대통령은 "저의 관여로 남북 관계가 잘 개선되기는 쉽지 않은 상태인데, 실제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며 "대통령께서 피스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로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또한 가을 경주 APEC에 트럼프 대통령을 초청하고 가능하다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만남도 추진해보자고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매우 슬기로운 제안"이라고 평가하며 여러 차례 치켜세웠다.

그러나 실제 북미 대화는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10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은 APEC CEO 회의와 미국-APEC 회원국 정상 간 만찬에만 참석하고 정상회의 본행사에는 불참했으며, 김정은과의 만남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북한 비핵화 문제가 여전히 요원함을 보여준다.

◆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활동

12월 31일로 종료된 한국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임기는 '미래 안보' 의제를 선점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1996년, 2013년에 이어 세 번째로 이사국을 수임하며 사이버 안보와 AI의 무기화 문제를 안보리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다.

특히 9월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안보리 고위급 토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 사례로, 한국이 국제 평화 유지의 수동적 기여자가 아닌 능동적 설계자(Rule-maker)로 발돋움했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분쟁 등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들의 대립 속에서 안보리의 기능 마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점은 다자 안보 기구의 한계로 남았다.

◆ 가치 외교: 인본주의·민주주의·자연주의의 실천

2024년 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2025년 한국 공공외교의 강력한 자산이 됐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전 세계 한국문화원에 'K-문학' 코너를 신설하고, 한국 문학이 담고 있는 역사적 상처의 치유와 인간 존엄성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외교적 언어로 승화시켰다. 이는 기존 K-팝, K-드라마 중심의 대중문화 확산을 넘어 한국이 깊이 있는 철학적·인본주의적 가치를 공유하는 '문화 선진국'임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은 제4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디지털 권위주의에 맞서는 국제 연대를 강화했다. 특히 가짜 뉴스와 딥페이크가 민주주의 선거 제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IT 기술을 활용한 팩트체크 시스템과 시민 교육 모델을 국제사회에 공유하며 '기술을 통한 민주주의 수호'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공적개발원조(ODA) 측면에서 한국은 자연주의적 책임감을 보여주려 했다. 2025년 ODA 예산은 전년 대비 8.5% 증가한 6조 7,972억 원으로 책정되어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ODA/국민총소득(GNI) 비율도 0.20%에서 0.21%로 증가했다. 이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기후 위기 대응과 빈곤 퇴치에 기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가 인천에 유치한 녹색기후기금(GCF) 운영 지원 예산을 전년 대비 68% 삭감(483억 원 → 154억 원)한 결정은 이러한 명분을 크게 훼손하는 자충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국제기구 유치국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글로벌 기후 리더십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는 이를 'ODA의 효율화'라고 설명했으나, 국제사회의 신뢰 저하를 막기 위해서는 2026년 예산 편성에서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요구된다.

◆ 경제 통상 지표: 냉혹한 현실과 실리 외교의 필연성

외교적 화려함 이면에는 냉혹한 경제 성적표가 자리하고 있다. 12월 1일부터 20일까지 수출입 동향을 살펴보면 한국 외교가 왜 그토록 처절하게 '실리'를 추구해야 했는지 명확해진다.

수출 총액은 43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6.8% 감소했다. 특히 반도체 수출이 41.8% 급감한 것은 IT 수요 부진과 재고 조정, 가격 하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대중국 수출은 6.5% 감소했고, 대미국 수출도 1.7% 감소했다. 수입 총액은 392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0.7% 감소했으며, 무역수지는 38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과의 조선업 협력, 중국과의 비자 면제 및 공급망 대화, 일본과의 경제 협력은 이러한 수출 절벽을 타개하기 위한 생존 전략의 일환이었다. 외교는 더 이상 의전의 영역이 아니라 경제 영토를 방어하고 확장하는 최전선이 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8월 정상회담에서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 분야 투자와 2,0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약속한 것, 11월 APEC에서 12억 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한 것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 외교는 국가 생존을 위한 경제전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 평가와 전망: 2026년을 향한 과제

2025년 대한민국 외교는 거센 파도 속에서 침몰하지 않고 '실용'이라는 닻을 내리고 '명분'이라는 돛을 조정하며 항해했다. 이재명 정부는 트럼프의 미국과 시진핑의 중국, 그리고 불안정한 일본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완전히 편승하지 않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첫째, 동맹을 재정의했다. 미국과는 안보를 넘어 산업(조선)으로 결속을 다졌다. 연간 60억~74억 달러 규모의 미 해군 MRO 시장 진출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한미동맹의 질적 전환을 의미한다.

둘째, 이웃을 재발견했다. 중국과는 민생을 고리로 관계를 복원했고, 일본과는 제도의 힘으로 관계를 지탱했다. 특히 중국의 비자 면제 조치와 일본과의 전용 입국심사대 운영은 정치적 갈등과 별개로 경제·인적 교류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가치를 확장했다. 노벨문학상과 민주주의 연대를 통해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가진 품격을 높였다. APEC 의장국으로서 AI 포용성 이니셔티브를 제안한 것은 한국이 국제 규범 설정자로 도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과제는 여전하다. 반도체를 이을 차세대 수출 동력을 외교적으로 어떻게 뒷받침할 것인가, 북러 밀착이라는 안보 위협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리고 삭감된 기후 기금 예산으로 어떻게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는 2026년 외교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외교는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최우선으로 두었다. 중국과의 초국적 범죄 대응 협력, 한일 간 전용 입국심사대 운영, 해외 체류 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 서비스 강화 등은 모두 국민의 실질적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민주주의 정상회의 참여와 팩트체크 시스템 공유는 민주주의 가치를 실천적으로 확산시키는 노력이었다.

자연주의적 책임 측면에서는 ODA 예산 증액이라는 진전이 있었으나, GCF 예산 삭감이라는 퇴행도 함께 나타났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국제기구 유치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한국 외교의 명백한 오점이다. 2026년에는 GCF 예산을 정상화하고, 재생에너지 및 탄소중립 기술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기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진정한 외교력은 국력이 강할 때보다 국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빛을 발한다. 2025년이 위기 속에서 기회를 모색한 '탐색의 해'였다면, 2026년은 그 기회를 구체적인 국익으로 실현하는 '결실의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예측 불가능성, 일본 정치의 불안정성 등 불확실성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외교는 더욱 정교한 균형 감각과 과감한 실용주의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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