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책임 논쟁, 국제사법재판소 공개심리 시작

섬나라 바누아투, "선진국들에 법적 책임 있다"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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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승인 2024.12.03 22:08 의견 0

2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는 기후변화에 대해 국가들이 져야 할 책임을 논의하는 공개심리가 시작됐다.

바누아투 대표로 참석한 아널드 킬 로프먼 검찰총장이 해수면 상승을 두려워하는 여러 작은 섬나라들이 기후 변화가 자신들의 생존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법원에서 진술하고 있다. 2024.12.3 (사진=AP)


이번 심리를 통해 ICJ가 내놓을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은 법적 강제력은 없으나 국제법 해석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날 첫 발언은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 공화국의 기후변화 및 환경 특사 랄프 레겐바누가 맡았다.

그는 이번 재판 개최 요구에 앞장선 바누아투 공화국, 그리고 이 나라와 인근 섬나라 국가들의 연합기구인 '멜라네시아 스피어헤드 그룹'(MSG)을 대표해 나왔다.

레겐바누는 "과거와 현재의 온실가스 배출 대부분이 소수의 국가들에 의해 발생시킨 것인데, 정작 큰 피해를 겪는 것은 나의 조국(바누아투) 같은 다른 나라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바누아투)는 우리 탓이 아닌 위기의 최전선에 서 있다"며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재해로 인해 생존의 위기에 처한 태평양 섬나라들의 상황을 호소했다.

바누아투 검찰총장 아널드 킬 로프먼은 "소수의 온실가스 다배출 국가들이 '행위(acts)와 부작위(omissions)를 통해 국제법 위반 행위를 저질렀다"며 이들 국가들이 국제법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누아투와 MSG의 수석 법률고문 마르하레타 베베링커-싱은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 행위와 화석연료 채굴을 위한 허가서 발행 등을 예로 들며, 해당 국가들이 끼친 손해에 대해 완전한 배상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개심리 첫날 국가들 사이에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법적 책임이 2015년 파리기후협약을 비롯한 UNFCCC(유엔기후변화협약) 틀 내로 한정되는지 여부에 대해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바누아투 등 작은 섬나라와 저개발국들은 이를 넘어서는 배상과 보상을 요구했으나, 독일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법적 책임이 UNFCCC 틀 내로 한정된다고 주장했다.

독일 외무부의 비프케 뤼케르트 국제공법국장은 "파리기후협약 당사국들은 법적 강제력이 있는 조항과 그렇지 않은 정치적 약속 사이에 조심스러운 균형을 맞춰놨다"며 이런 구분을 깨뜨릴 경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려는 국가들의 의지에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카리브해와 대서양을 낀 섬나라 앤티가바부다 대표로 발언한 재커리 필립스 변호사는 "과거와 현재의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국가들의 법적 책임이 UNFCCC 틀 내로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국제관습법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ICJ는 13일까지 98개국 대표들의 진술을 청취할 예정이며, 세계 주요국 대다수가 대표단을 파견한 상태다.

한국 대표단도 3일 오후(한국시간 4일 새벽)에 발언할 예정이다.

대부분의 나라와 단체는 각각 30분간 발언한다.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과거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영국과 러시아, 현재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 등을 포함한 세계 주요국 대다수가 대표단을 보냈다.

ICJ 공지에 따르면 대표단에는 황준식 외교부 국제법률국장,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이 포함됐다.

ICJ는 이번 공개심리를 바탕으로 내년에 권고적 의견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ICJ 심리는 작년 3월 유엔 총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결의안에 따른 것으로, 국제사회는 이번 심리가 기후위기 대응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당시 총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국가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또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을 경우 어떤 법적 결과가 따를 수 있는지에 관해 ICJ가 권고적 의견을 내도록 요청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남태평양대학교(USP) 법대 학생들이 2019년 시작한 캠페인과 바누아투 정부가 앞장선 외교적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2011년에도 팔라우를 중심으로 이런 ICJ 재판을 요구하는 운동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번 ICJ 재판은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29차 UNFCCC 당사국총회(COP29)가 지난주에 폐막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열렸다.

COP29에서는 과거에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했던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2035년까지 연간 3천억 달러(420조 원)의 분담금을 내놓겠다는 합의가 이뤄졌으나, 개발도상국들은 이에 대해 형편없이 부족한 액수라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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