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판매중인 타이레놀 포장/켄뷰(Kenvue) 자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이 23일(현지시간)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 주성분) 복용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위험을 높인다고 주장해 전세계 의학계가 일제히 반박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임신부들에게 "타이레놀을 먹지 마세요, 먹지 마세요"라고 최소 10회 이상 반복하며, 약물 복용을 피하는 것을 "버텨내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약물을 피하는 데에는 "어떠한 단점도 없다"고 주장했다.
케네디 장관은 4월 "5개월 안에 자폐증의 원인을 밝혀내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이번 발표가 예고된 것으로 분석된다. 행정부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약물 라벨을 개정하고 전국 의사들에게 아세트아미노펜 사용이 "자폐증의 매우 증가된 위험과 연관될 수 있다"는 서신을 보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과학적 근거 부족 지적
행정부의 주장은 주로 관찰 연구들과 8월 마운트 시나이 및 하버드 연구진이 발표한 체계적 문헌고찰에 근거하고 있다. 이 연구는 46개 연구를 분석한 결과 "더 질 좋은 연구일수록 연관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연구 저자들조차 신중한 해석을 촉구했다. 마운트 시나이의 디디에 프라다 박사는 "우리는 아세트아미노펜이 더 높은 위험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지, 그것이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매우 다른 것"이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더욱 결정적인 반박 증거는 2024년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발표된 대규모 스웨덴 연구에서 나왔다. 아동 약 250만 명을 분석한 이 연구는 '형제자매 통제 분석' 설계를 사용해 단순 분석에서 관찰된 미약한 연관성이 형제자매 통제 분석을 적용하자 '완전히 사라졌다'는 결과를 보고했다.
전세계 의료계 일제 반발
미국 산부인과학회(ACOG) 스티븐 J. 플라이슈먼 회장은 행정부의 주장을 "무책임하고", "매우 우려스러우며", "전체 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ACOG는 아세트아미노펜이 임신부에게 안전한 몇 안 되는 진통제 중 하나이며, 치료받지 않은 질환의 위험이 "이론적인 우려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재확인했다.
미국 모성태아의학회(SMFM)는 "기존 연구에 대한 철저한 검토 결과... 인과관계가 확립되지 않았다"며, 기존 연구들이 "방법론 및 설계상 중대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연구 결과가 "인과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며,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은 "혼란스럽고 위험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비판했다.
국제기구들도 반박 대열
세계보건기구(WHO) 대변인은 타이레놀과 자폐증을 연결하는 증거가 "여전히 일관성이 없다"고 밝혔으며, 유럽의약품청(EMA)은 "기존 지침을 변경해야 할 새로운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다.
영국 의약품건강관리제품규제청(MHRA)과 호주 치료제품관리청(TGA)도 모두 파라세타몰이 임신 중 안전하고 권장되는 선택지임을 확인했다.
연방법원 "과학적 근거 없다" 판결
미국 연방법원은 이미 관련 집단소송에서 신뢰할 만한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원고 측 전문가 증언을 기각했다. 뉴욕 남부 지방법원 데니스 L. 코트 판사는 2023년 12월 도버트 심리를 통해 원고 측 주요 인과관계 전문가 5명 전원의 증언을 배제했다.
코트 판사는 전문가들의 과학적 증거와 방법론이 임신 중 타이레놀 사용과 자폐증/ADHD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에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2024년 8월 피고 측의 약식 판결 요청을 승인하여 연방 집단소송 내 모든 사건을 기각했다.
공중보건 우려 확산
행정부의 메시지는 임신부들에게 치료받지 않은 발열이나 통증으로 인한 입증된 위험과 약물 복용으로 인한 이론적 위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극심한 딜레마를 안겼다.
특히 임신 초기의 치료받지 않은 고열은 유산, 선천적 기형(신경관 결손 포함), 조산의 위험과 관련이 있으며, 잠재적으로 신경 발달 문제 자체를 유발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셀린 가운더 박사는 임신부들이 위험한 고열을 앓거나, 혹은 이부프로펜과 같은 더 위험한 대안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상황과 대응
이 논란은 대한민국 임신부들 사이에서도 우려와 불안을 야기했으며, 온라인 커뮤니티('맘카페')를 중심으로 관련 논의가 확산되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MFDS)는 아세트아미노펜 제조 및 수입업체에 관련 의견과 자료 제출을 요청하고, 해당 증거들을 신중히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내 의료계도 해당 주장이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임신부들이 불필요하게 겁을 먹고 필요한 약물 치료를 기피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경제적 파급효과도
발표는 즉각적인 경제적 영향도 미쳤다. 타이레놀 제조사인 켄뷰(Kenvue)의 주가는 발표 당일 7.5% 하락하여 약 26억 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입장이 "내가 느끼는 바에 기반"하며, "그들(과학자 그룹)이 특정 연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내 입장이 그룹보다 더 강할 수 있다"고 인정해 그 근거를 스스로 약화시켰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복잡한 과학적 이슈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단순화되고 무기화된 과학의 정치화 사례라며, FDA, CDC와 같은 핵심 기관과 주류 의료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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