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방동네 사람들>의 한 장면/KMDb


한국 영화사의 살아있는 전설 안성기(72) 배우의 연기 인생 60년을 기리는 대규모 회고전이 20일 서울아트시네마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개막했다. 오는 31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행사는 국내 최초로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망라하는 역사적 기록 작업이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2019년 혈액암 진단 이후 투병 중이라 참석하지 못해 애잔함을 더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배창호 감독의 1982년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은 안성기가 아역 이미지를 완전히 벗고 성인 연기자로 거듭난 분기점이자, 1980년대 한국 영화 리얼리즘의 새 물결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일 첫날 상영에는 배창호 감독과 여주인공 김보연이 참석해 당시 촬영 비화를 관객과 나눴다.

<꼬방동네 사람들> 주연 배우 김보연/사진=외교신문


이 영화는 도시 빈민의 삶을 다룬 이철용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가 이철용은 1970~80년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이동철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도시 하층민의 처절한 생존기를 세상에 알렸다. 그는 이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장애인과 빈민을 위한 입법 활동에 헌신했으며, 현재는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영화 속 '꼬방동네'는 일본어 '하코(箱, 상자)'와 한국어 '방(房)'이 결합된 '하꼬방'에서 유래한 용어로, 6·25전쟁 이후 부산 피난민들이 지은 판자집을 일컫다가 이후 서울 등 대도시 산동네 무허가 정착촌의 대명사가 됐다. 1970~80년대 급격한 이촌향도 현상으로 상경한 농민들이 도심 외곽에 형성한 이 공간은 도시 계획상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곳이었지만, 동시에 끈끈한 정과 상호부조가 살아있는 이중적 장소였다.

관객과의 만남/사진=외교신문


배창호 감독은 이 작품에서 처절한 빈곤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멜로드라마의 서사 구조를 결합해 인간애와 희망을 포착했다. 실제 판자촌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가파른 계단과 미로 같은 골목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특히 김보연이 연기한 명숙이 끼고 다니는 검은 장갑은 화상 흉터를 가린다는 설정을 넘어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비밀을 상징하는 미장센으로 활용됐다.

안성기는 소매치기 전과자 출신으로 아내와 아들을 되찾고자 하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주석 역을 대사보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연기했다. 배창호 감독은 "대립과 갈등은 있지만 누군가를 악당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연출 철학을 밝힌 바 있으며, 김보연의 눈물 연기를 두고 "백만 불짜리"라고 극찬했다.

영화에는 빈민 운동가 공병두 목사 역할도 등장하는데, 이는 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과 하월곡동 달동네에서 탁아소를 짓고 빈민들과 동고동락했던 고(故) 허병섭 목사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이철용 작가는 허 목사를 "소금처럼 가난한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또한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이 특별출연해 영화에 다큐멘터리적 질감을 부여했다.

<꼬방동네 사람들> 감독 배창호/사진=외교신문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검열 환경 속에서도 배창호 감독은 빈민들의 고단한 삶을 은유적으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해냈다. 원작 소설이 가진 날 선 사회 비판은 영화화 과정에서 순화될 수밖에 없었지만, 전과자의 사회 복귀 좌절과 범죄자의 불안은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구조적 모순을 시사했다.

이번 회고전은 '실미도', '고래사냥',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 스타' 등 안성기의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대표작 10편을 상영한다. 주최 측은 안성기 배우가 "자택에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어 참석이 어렵다"고 밝혔다.

43년 전 꼬방동네는 이제 사라지고 아파트 숲이 들어섰지만, 영화 속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여전히 보편적 가치로 남아있다. 안성기의 부재는 이번 행사를 단순한 축하의 장이 아니라, 그의 쾌유를 기원하고 한국 영화사에 남긴 족적을 성찰하는 헌정의 장으로 만들었다. 현재 전 세계를 강타하는 K-컬처의 뿌리가 1980년대부터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켰던 노력에 있음을 이번 회고전이 보여주고 있다.

최인호 원작, 안성기 주연 영화 <구멍> 감독 김국형, <꼬방동네 사람들> 주연 배우 김보연/사진=외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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